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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한인사회 어제와 오늘
초기 개화파 한인 미국 망명객들의 고초
<기획연재> 뜻으로 본 미주한인 이민125년사
기사입력: 2009/04/29 [20:50]   honaminworl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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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모
재미 한인 125년사 (1883-2008)


1)초기 망명객 들의 고초와 미언론의 관심
 
갑신정변에 가담한 개화파 대표 중에 끝까지 국왕을 보좌하던 홍영식 등은 대부분 청군에 의해 피살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유혁로, 이규완, 변수, 정란교, 신응희 등 9명만이 일본 공사관에 피신한뒤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에  한말의 조선정부는 그 대표적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 등을 대역죄인이라 하여 한국으로 이송하도록 일본정부에 계속 강력히 요구했기에 그들은 변성명하며 신분을 감추고 극도의 궁핍과 고독의 고초 속에 재냈다.   이규관의 고백과 같이 이들의  운명은 믿을 수 없는 “일본인의 수중에 있었기에”처절하여 자결이라도  할 위기의 처지였다. 더 이상 다른 출구가 없기에  마침내 이들은 미국 망명을 결심하고 겨우 여비를 벌어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정란교, 신응희 등 6명은 1885년 5월 26일 페킹호 The City of Peking 로 설움 많은 조국과 일본을 뒤로 하고 요코하마를 출항하여 미국의 망명 길에  나섰다.

특히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세 사람이 미국망명을 결행한 경위에 대해 서재필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여러가지를 생각한 결과, 장차 조국의 풍운을 다시 한번 일으키려면 우선 미국같은 나라에 가서 배우기도 하고, 구경도 하여 견문을 넓히며 세계대세를 잘 살펴보는 것이 득책이라 생각했다. 미국 가기로 작정은 했으나 그날그날 지내기도 어려운 처지에서 여비를 구할 도리가 없어 이들은 글씨를 써 삼개여월 일본 사람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팔아 약 90여원을 마련하여 미국망명 길에 올랐다.

이들이 일본을 떠나기 전, 특히 서재필이 한국선교의 도상에 있는 언더우드를 일본에서 만나게 되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서재필이 한국말을 배우려 요코하마까지 와 있던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를 만나 그의 집에서 한국말을 가르쳐주고 자신은 영어를 배우게 된 사실이다.  선교를 위해 한국으로 떠나는 언더우드와 한국의 장래를 위해 미국으로 떠나는 서재필이 한국에 가장 피해를 준 일본 땅에서 만나 나눈 내용은 잘 모르나 먼 훗날 이들이 모두 한국의 근대화에 공헌하는 선각자들이 된 것을 회고하면 신적인 섭리까지도 생각하게 된다. 그 많은 선교사와 한국의 망명 유학생들이 양국을 오고갔으나 이 두 사람은 한국과 미국에서 저들의 일생을 살면서, 언더우드는 선교와 함께 서구문명을 통한 한국의 근대화에 공헌하고, 서재필은 일제에 신음하는 한국인의 자주 독립과 근대화만이 아니라 재미한인들의 귀감이 되는 롤모델의 생을 살았기에 잊을 수 없다.

이들 한인 망명객들은 1885년  6월 11일 미국 땅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아직 서구가 만든 세상을 모르고 잠만 자던 나라에서 자란 이들의 첫 눈에 비친  거대한 샌프란시스코 일대의 도시와 시설등의 장관은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 다른 한편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세 사람이 가까스로 마련한 요꼬하마를 떠날 때 마련한 90원 중 선비와 잡비로 쓰고 남은 것은  거의 없는  거지 신세였기에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가 걱정이었다. 이 때의 저들의 심경이나 정황은 서재필이 1934년 말, 그 날을 회고하며 기록하여 동아일보에 게재한 ‘체미 50년’이란 글에 잘 묘사되었다. “우리는 아는 사람도 없고 돈도 없고 언어도 통하지 않으며 이 나라 풍습에도 익지 못하였다. 이처럼 생소한 곳에서 우리는 온갖 고초를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는 금릉위이던 박영효씨나 바로 1년 전까지 …[보빙사절의 제3인의 미국빈 자격으로 왔던] 서광범씨의 지위를 알아주는 이가 전혀 없었다. 그러니 아무 명목도 없는 나인지라, 나 자신 남이 몰라준다고 물론 낙심하지를 아니하였다. 우리 세 사람은 태평양의 거친 파도에 밀려서 캘리포니아 해안에 표착한 쓰레기같이 외롭고 가엾어 보이는 존재들이었다.” (동아일보 1935/1/3-4 연재) 한국 침략의 기회만을 노리던 왜정을 믿고 거사한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일본의 배신으로 결국 실패하고, 나라의 대역적으로 몰려 정착할 곳도 없고 부모 처자식들까지 다 몰살을 당한 이 젊은 망명객들의 진솔한 표현이었다.

여하튼 이들이 상항에 도착한 직후인 1885년 6월19일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는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의 세 망명객에 대해 대서특필했다. 기사는  갑신정변의  실패와  한국의 정황,  미국망명을 택한 이들의 인물과 경력, 그들의 도움이 필요한 오늘의 딱한 처지 등까지도 상세히 보도했다.  표지의 기사는” “은둔자의 나라에서 온 망명객들, 반란 끝에 온 방랑자들, 진보적 세 지도자들의 피난처 샌프란시스코” Corean Refugee, Exiles from the Hermit Nation, The Waifs of a Rebellion, San Francisco as the Asylum for Three Leaders of the Progressionists등의 제목들로 시작된 꽤 긴 글이었다. 기자는 망명객에 관한 기사보다는 한국의 정치 정세에 더 관심하고 있으나  약간의 망명객의 행색이나 처지에 관해서도 언급했기에 미국인들이 이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에 도움이 될만한 글이었다.  그 요지를 들어보자.
 
강대국 청일 양국 사이에 자리잡은 한국의 처지를 기자는 마치 양국이 “곡물을 멧돌질하여” ( ground grain)   집어 삼키려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고 표현했다. 이처럼 침략에 직면한 한국은 보수적인 사대당과 진보적인 개화당으로 갈리고 보수당의 뒤에는  청국이, 개화당의 뒤엔 일본이 있어 그 대립은 심각한 상태다. 이들 세 사람은 일본의 지지를 받는 개화파 지도자들로서 김옥균 지도하에 일본의 지지약속을 믿고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정치적 망명객의 몸으로 미국에 왔다. 이들은 개혁파 인물 중에 가장 젊고 유능한 인물이며, 한국정부의 고위관직을 역임한 양반지배계층이다. 한때 부유하고 권세가 당당했던 그들이 지금은 상항의 빈민가에서 도움받을 친구도 없이 가장 가난하고 약한 밑바닥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신세를 아무런 불평도 없이 받아들이고 조국 개화의 실현을 위한 투쟁으로 여기며 어떤 희생도 감수한다.이들이 영어는 모르나 일어에 능하기에 영어를 배우려 할 것이며 버크리대학에서 공부하려 입학 신청을 고려하고 있다. 장래가 촉망되고 교육열이 대단하나 학자금과 생활비가 없어 난관이다. 저들은 친절한 친구의 재정적 도움이 절대로 필요하다. (San Francisco Chronicle, 6/19/1885)

일행 중 서광범은 1년 반 전인 1883년 9월부터 11월까지 보빙사절의 참사관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잠시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미국 여러 곳을 시찰하며 11월엔 사절 대사 민영익과 함께 런던 파리 등의 대도시와 지중해를 거쳐 세계 일주의 여행까지 한 일이 있었으나, 아는 이나 맞아줄 사람 하나 없고 무일푼의 당시의 신세는 처량한 다른 망명객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때문에 이들은 상항 서편의 빈민가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그날그날 먹을 것을 구하며 지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초의 나날을 보내던 저들은 일자리를 구하나 여의치 않기에 미국으로 떠날 때 “굶으나 먹으나 행동통일을 하여 끝까지 한 곳에서 같이 생활하기로 한 결심”을  깨고 각자 흩어지기로 했다. 이 때의 심경을 서재필은 ‘체미50년사“에서 “우리는 여러 주일 동안 말로 할 수 없는 마음의 고통과 물질의 궁핍을 겪고 치르다가 끝끝내 이처럼 세 사람이 같이 지내기는 곤란한즉, 따로 떨어져 지내기로 결심 하였다.”고 술회했다.

이에 서광범은 요코하마에서 친분을 나눈 한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의 소개로 알게 된 뉴욕의 사업가인 그의 형에게 연락이 되어 도움을 청했다. 마침 형 언더우드는 뉴욕까지의 여비를 보내주어 서광범은 뉴욕으로 떠났다. 극도의 생활고초를 겪던 박영효와 서재필은 모든 노력에도 일터를 구하지 못했다. 둘이서 함께 살 계책이 없어 정말 힘든 처지에서 살길을 모색하던 중에, 철종의 사위요 양반귀족이던 박영효는 더 견디기 어려워 어찌할바를 모르던 차에 일본으로 다시 돌아갈 기회가 생겼다. 서재필이 동경유학시절에 지면이 있던 후쿠자와의 조카를 우연히 만나 박영효의 처지를 설명하며 도움을 청했다가 그의 도움을 받게 된것이다. 이에 박영효는 “미국사람들은 양반을 몰라본다. 양반은 아무리 [고생]하더라도 노동을 할 수 없다. 일본에서는 내가 양반이란 신분을  알아주므로 설마 천한 일을 아니하게 될 것이다.” 개혁의 주도세력이요 진보적인 인사라 하지만 그의 양반에 관한 생각이나 노동을 하층계급이 하는 것으로 여기는 한국 재래의 고정관념이 아직도 깨어지지는 못한  말이었다. 이렇게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일본의 창옥정에 있는 김옥균의 집에 머물었다고 ‘명치편년사’(6권p 216, 동경일일 1886/1/3)는 전한다. 한편 가장 젊고 어린 서재필은 아무리 귀한 사람이라도 미국에서는 노력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터득하고, 단신으로 미국의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생계를 이어 갔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상항에 도착한 때는 ‘중국인 배제법’Chinese Exclusion Act이 발효하여 동양인들의 정착이 아주 어려운 시기였다. 여러 만명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캘리포니아 사람들에게 천대와  배격을 받으며 그 증오가 날로 격심하던 터였기에 한국의 망명객들에게도 그런 차별이 예외일 수 없었다.  이들이 상항 거리에 나갔다가 짐마차 위에서 교수형을 당한 중국인의 머리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는 인형을 보고  미국의 인종차별과 중국인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큰가를 실감했다. 이제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에서 서재필과 서광범이 어떻게 생존하며 저들의 애국적인 초지를 살려갔는가를 일별하려 한다. 본장에서는 한국 정기이민1903년전후까지의  저들의 초기 활동만을 살피며 후반기의 생은 뒤에  계속하여 상고하려 한다.  
 
<박성모 /새누리 편집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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