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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한국방
이민국의 뚜응 대위
기사입력: 2010/11/28 [16:21]   honaminworl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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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보이스
 정해진 숙소에서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푹 자고 나서 첫 출근을 했다. 통근버스를 운행하는 일이 내게 첫 일감으로 배당되었다. 시내에서 월남인 직원들을 태워서 부대 안에 있는 회사로 출근시키는 일이었다. 버스라고는 하지만 실은 트레일러를 임시 개조한 것으로 양쪽 벽에 작은 창문을 뚫고 천장 가운데에는 입석 승객들이 잡을 수 있도록 손잡이를 달아놓은 것이었다. 양쪽 가장자리에는 60년대 우리 나라 시내버스처럼 길다란 의자가 설치되어 있었다.

  부대는 캄란만을 바깥으로 섬처럼 에워싸고 있는 모래 산과 같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육지와 연결된 북쪽 끝으로도 길이 나 있지만 캄란만을 가로질러 다리로도 연결되어 있었다. 처음 내가 월남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제대로된 교량이 아니라 작은 폰툰이란 것들을 띄워놓고 그 위에 차가 건너갈 수 있도록 임시로 ‘부교’(浮橋)를 설치해놓았었는데 어느 사이에 미군들이 그것을 철교로 바꿔놓았다. 

  통근버스는 베트콩과 연계된 자가 무기나 폭발물을 숨겨 가지고 들어오는 것을 사전에 적발해내기 위해 다리 앞에서 일단 정지하고 검문을 받았다. 월남전은 전선이 따로 없는 게릴라전이었다. 그래서 어느 곳에서나 검문 검색을 철저히 했다. 내가 몰던 통근버스도 마찬가지였다. 다리 앞에서 검문을 받은 후 부대 안까지 그대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정문 앞에서 모두 하차시키고다시 한 번 몸을 수색한 다음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검문 때는헌병이나 경찰이 올라와 한 번 둘러보고 미심쩍은 사람을 골라 신분증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 일일이 몸을 수색하였다. 그 동안 버스는 빈차로 얼마간 앞에 나가서 기다리면 수색이 끝난 사람들이 검문선을 지나 걸어와서 올라타게 하였다.
   
  취직이 되자 나는 비로소 월남생활이 순조롭게 풀려나가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차를 몰면서 휘파람을 부는 여유도 생겼다.  열심히 달러를 모아 서울로 돌아가서 뭔가 멋진 돈벌이를 해보리라 마음먹었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세상 일이 다 그렇듯 나의 월남 생활도 그렇게 생각대로만 움직여주지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또 뭔가가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첫 급여를 타고나서 두어 주일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강씨, 나 좀 봅시다.”

  트레일러 버스에서 사람들을 내려놓고 나서 사무실 앞을 얼쩡거리고 있는데 인사과 직원 하나가 문을 빼꼼이 열고 나를 불렀다.

  “사이공에서 이런 공문이 내려왔는데....당신에 대한 입국 기록이 없다는 거요.”

  회사에선 매월 급여를 지급하고 나면 월남 노동청에 보고를 하는데 거기서 이민국에 조회를 한 모양이었다. 나의 입국 기록이 없다고 공문이 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올 것이 너무 빨리 왔구나” 싶었다.

  “내가 사이공에 직접 가서 해결을 하고 오면 안 될까요?”
  “안 될 거야 없지요. 그럼 내일이라도 다녀오지 그래요.”

  인사과 직원은 쉽게 허락해 주었다. 이민국 문제가 처리될 때까지 일을 할 수 없다고 해도 할말이 없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장 해결할 뾰족한 방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시간을 벌면서 무슨 수를 찾아보자고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이젠 사이공에 있는 이민국에 찾아가서 부딪쳐볼 수밖에 없었다.

  같이 일하던 동료에게서 사이공의 이민국을 어떻게 찾아가는지 대강 설명을 들은 나는 다음 날 일찍 공항으로 나가서 빈자리를 얻어 타고 사이공으로 갔다. 밀입국자지만 정식으로 취업한 직원이니까 알래스카 바지사에서 여행증을 만들어 주었고 그걸로 군용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처음 입국할 때와는 천지차이였다. 불안하지도 않았다.

  사이공에 도착한 나는 값이 싸 보이는 이류 호텔에 들었다. 침대도 허름했고 그 위에 덮여 있는 시트도 낡아빠진 것이었다. 이민국에 찾아가서 문제를 해결할 묘안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잠이 올리 없었다. 색바랜 허연 천장에 도마뱀 한마리가 스르륵 스르륵 기어다니고 있었다. 도마뱀은 천장과 같은 허연 보호색을 띠고 있었지만 불빛에 그늘이 져서 금세 눈에 띄었다. 처음 월남에 왔을 때 잠을 자다가 얼굴 위에 도마뱀이 떨어져 기겁을 하던 기억을 떠올리자 그 와중에서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익숙해져 천장에 벌레가 붙어 있는 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사람의 느낌처럼 변화무쌍한 것도 없을성 싶었다. 

  다음날 우선 부딪쳐보자는 심정으로 이민국을 찾아갔다. 이민국은 국민학교 교사처럼 생긴 건물에 있었다. 근무하는 사람들은 모두 군인인 모양이었다. 민원실에 앉아서 이런 저런 궁리를 하며 분위기를 살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다음날 다시 이민국에 찾아가 민원실에서 바깥을 내다보고 있노라니 조회라도 하는지 직원들이 마당에 모이고 있었다. 나의 시선이 단상위의 사람에게 쏠렸다.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었는데 훈시라도 하는 것을 보면 꽤 높은 사람인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저 사람이다!” 하고 그를 지목했다. 어떻게든지 그를 잡으면 길이 생길 것만 같았다.

  나는 문 앞에 나가서 기다리다가 조회가 끝나고 돌아가는 대위를 멀찌감치 뒤따라갔다. 복도를 따라가다가 그가 자기 방으로 들어간 뒤 나는 그 앞을 지나치면서 문 위에 붙어 있는 명패를 외어 가지고 돌아왔다.

  “뚜옹 대위를 면회하러 왔습니다.”
  나는 이민국 정문 위병에게 면회를 신청했다.
  “잠깐 기다려 보시오.”

  그는 전화기를 돌리더니, “당신 이름이 뭐라고 했소?” 하고 수화기를 손으로 막은 채 물었다. 그 쪽에서 누구냐고 묻는 모양이었다. 제기랄, 쉽게 되는 일이 없구나.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이름을 대주었다.

  “강이라는 따이한 사람인데요?”
  그는 수화기를 다시 손바닥으로 가리고 또 물었다.
   “당신 이름을 처음 듣는다는데? 용건이 뭐요?” 
  “만나보면 안다고 해요.”
  나는 망설이는 기색이 없이 그렇게 말했다.
  “만나보시면 안답니다.”

  그는 내 말을 그대로 흉내내듯 전화기에다 대고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는 전화를 내려놓고 뚜응 대위가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쟁중이었으므로 낯선 사람을 무턱대고 만나주지 않는 것도 이해할만 했다. 일단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나는 이민국에서 나와 길가에 있는 가게에 앉아 음료를 시켜놓고 대위를 만날 방법을 다시 궁리하기 시작했다.

  “아주머니, 이민국 몇시에 문을 닫습니까?”

  가게 주인에게 담배를 두 박스 사면서 물었다. 퇴근 시간에 대강 맞춰서 억지로라도 만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이민국으로 가서 아까 만났던 위병에게 담배 두 박스를 주면서 다시 한 번 뚜응 대위 면회를 하자고 했다.

  “만나지 않겠다고 했는데....”
  위병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담배는 슬그머니 책상 밑으로 밀어 넣는 것이 어떻게 해보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나는 고맙다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여기서 기다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위병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시 반이 되자 지프차가 한대 굴러 나오는 것이 보였다. 위병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뚜옹 대위가 틀림없었다. 위병은 밖으로 나가더니 손을 들어 경례부터 한 후 지프를 세웠다.

  “바로 저 사람이 강신목이란 사람인데 벌써 몇 차례나 찾아와서 과장님 면회를 하겠답니다.”
  위병이 나를 가리켰다. 나는 그 때를 놓칠 세라 지프 옆으로 다가갔다.
  “무슨 용무요?”  대위가 차에서 내다보며 귀찮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 여기서 말씀드리기는, 좀....”

   퇴근시간이어서 대위의 지프 뒤쪽으로 벌써 차들이 여러 대 줄을 서 있었다. 대위도 기다리는 차들을 힐끗 돌아보았다. 나는 얼른 ‘아리랑 하우스’를 아느냐고 묻고 거기로 가서 저녁 대접을 하면서 얘기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누군 줄 알고 내가 식사 대접을 받는단 말이오?”

  그러나 따이한한테 식사 한끼 얻어먹는다고 해서 탈이 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거절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는 차들이 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좌우간 타시오.” 하며 나를 뒷좌석에 오르게 해 주었다. 일이 계획대로 잘 풀리는 것 같았다. 낮에 억지로 면회신청을 했다가 거절 당한 후 가게에서 궁리해낸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한국인들이 잘 가는 음식점 ‘아리랑 하우스’에 가서 뚜응 대위를 구워삶으면 일이 풀릴 것 같았다.

  ‘아리랑 하우스’에는 낮에 미리 예약을 해두었으므로 뚜옹 대위와 함께 들어서자 종업원이 뒤쪽에 있는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미리 시켜놓은 대로 시원하게 냉장시켜 두었던 맥주가 물기를 머금은 채 쟁반에 얹혀서 들어오고 곧이어 불고기 판에 고기가 올려져서 지글지글 익어갔다.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뚜옹 대위도 꽤나 먹음직스럽다는듯 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아리랑 하우스로 뚜응 대위를 데려와 음식을 접대하는데까지는 성공했으나 나의 월남어 실력이 시원치 않아 대화가 잘 되지 않았다. 왠지 분위기가 서먹서먹했다. 말이잘 안 통하지 않자 뚜응 대위와 나는 줄곧 맥주만 들이키게 되었고, 어느 새 둘 다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그날 저녁은 끝내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말았다. 대위가 너무 취하는 바람에 그대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나는 다시 이민국으로 찾아갔다. 물론 퇴근 시간에 맞춰서였다. 이번에는 위병소 위병에게 ‘어제 그 장소에서 만나자’는 말을 뚜응 대위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어제 갖다준 담배 두 보루의 효과가 아직도 남아있었다. 위병은 오랜 친구처럼 나를 대해주었다. 뚜응 대위에게 내 말을 충실히 전해줄 것 같았다.나는 안심하고 아리랑 하우스로 발길을 돌렸다.

  아리랑 하우스에서 기다리자 뚜응 대위의 지프가 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일은 절반 이상 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맥주와 불고기를 시켜놓고 나는 뚜응 대위에게 나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 같은데....”

  그는 이야기를 미처 다 듣기도 전에 꽁무니를 뺐다.
  “난 말이요, 취업 허가증을 내어줄 힘이 없는 사람이요. 내 임무는 불법 입국자를 색출해내는 것 뿐이란 말이요. 알겠소?”

  헛다리를 짚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나는 계속 밀고나갔다. 담당이든 아니든 뚜응 대위를 물고 늘어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궁리를 해본 후 입을 열었다.

  “그럼.....나를 그냥 내버려만 둬줄 수는 있습니까?”
  “그거야 뭐 간단하지. 당신에 대한 보고서를 없애버리면 되니까.”
  “그럼 그렇게 좀 해 주십시오.”
  나는 식사 후 그의 주머니에 준비해온 봉투를 찔러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캄란으로 돌아왔다.            
 
 베트콩의 구정 공세
 
  “사이공에 간 일은 잘 되었소?”
  “물론입니다.”
  “입국 기록을 찾아냈단 말이오?”
  “아니..., 네, 어쨌든 해결하고 왔어요. 앞으로는 이민국에서 나를 출두하라 말라, 말이 없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민국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좋아요. 그리고 통근차 운행은 다른 사람에게 넘길 테니 오늘부터 보급차를 운전하도록 하시오.”

  알래스카 바지는 함정 수리등 미해군의 용역을 맡고 있는 운송업체였기 때문에 해군에 필요한 온갖 보급품들을 보급기지에서 부대까지 운반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것들을 타오는 일을 내가 맡게 된 것이었다.

  나는 보급계에서 사무를 보는 권씨와 소위 ‘콤비’가 잘 맞았다. 회사에서도 권씨와 나를 아주 유능한 하나의 팀으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눈치 빠르게 미리미리 보급품을 확보해두는가 하면 부대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제때에 충족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물자가 흔한 나라 미국의 해군 보급품은 규모나 종류가 엄청났다. 가난한 나라 한국에서 온 나로서는 미국이 복 받은 나라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67년 당시 캄란의 미군부대 폐차장에는 포격에 부서진 자동차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어떤 것들은 수송선에 실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박격포를 맞았는지 한쪽 귀퉁이만 부서져 있기도 했다. 지뢰를 올라탔다가 바퀴 쪽이 뭉텅 날아가 버린 지프도 있었다. 드럼통을 펴서 버스 차체를 만들던 한국 사람들 눈에는 아까운 돈덩어리들로 보였다. 어떻게든 고쳐서 새차로 다시 쓸만한 것들도 폐차 처분해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폐차장을 관리하는 미군 하사관을 찾아가 부탁을 했다. 물론 맥주를 두어 상자씩 사들고 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여기 저기 찌그러지긴 했어도 그냥 쓸 수 있는 차들도 제법 있었다. 움직일 수 없는 것들은 관리하사관의 싸인을 받아다 시의원인 랑의 아버지에게 가져다주면 수리를 한 다음 월남 차량 번호판을 달아 세를 받고 빌려주었다. 또 어떤 차는 양키 물건을 취급하는 랑의 어머니를 통해 팔아먹는등 쏠쏠한 재미를 보았다.  나는 세를 놓는 것은 내 몫이라고 분명히 해주었지만 챙기지는 않았다. 

  그런 식으로 내가 랑의 집을 뻔질나게 들락거리자 한국인들 사이에 랑과 나의 사이가 보통관계가 아니라는 소문이 퍼졌다.

  “강씨, 처가집은 좋겠어.”
  주말이면 외출준비를 하는 나에게 그렇게 농을 던지는 동료들이 많았다. 사실 랑은 아직 이마에 여드름이 돋아 있을 만큼 소녀 티가 채 가시지 않은 어린 처녀였고 나는 서른이 다된 처자가 있는 몸이어서 남녀관계는 없었다. 그러나 많은 한국인들이 서울에 처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총각이라고 속여 월남 여인들과 동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와 랑 사이를 그런 눈으로 볼만도 했다. 하지만 랑은 나에게 월남어 통역을 해주는 관계에 불과했다. 나는 랑에게 한국말을 가르쳐 주었고 랑은 나에게 월남어를 가르쳐주다보니 자주 그녀의 방에 드나든 것은 사실이었다.  또 랑의 집에서도 나를 진짜 사위처럼 극진히 대접해주었다. 

  어느 해 구정무렵이었다. 하필이면 구정을 전후해서 나트랑으로 산소를 사러 가야할 일이 생겼다. 알래스카 바지사는 해군 군수업체여서 용접용 산소를 많이 사용하였다. 또 병원에서도 산소를 많이 쓰고 있었다. 동료 직원 권씨가 산소가 다 떨어져 간다길래 확인해보니 정말로 재고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필요할지 모르는데 어떻게 하지?”
  권씨의 속셈은 민간인 시장에 나가서라도 구해다 놓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 산소 구매명령이 떨어져도 보급창에 재고가 없다고 하면 그만이긴 했지만 권씨와 나는 각종 물건을 교묘한 방법으로 빼돌리던 참이라 회사에 신용을 쌓을 필요가 있었다. 물건이 떨어지면 내 지갑에 있는 돈을 털어서 사제시장에서라도 필요한 물건을 사서 채우곤 했다. 언제 무슨 물건이 필요하다고 해도 나와 권씨가 담당하고 있는 한 요청만 하면 틀림없이 공급해 준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물론 물건을 빼다 판 돈이었고 내돈 100 달러를 쓰면 나중에 1천 달러를 빼먹곤 했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었다.

  어쨋든 권씨와 나는 나트랑에 가서 산소를 사다놓기로 했다. 랑의 집에 가서 나트랑에 가야할 일이 생겼노라고 지나가는 얘기 비슷하게 하자 랑의 아버지가 아주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미스터 강, 나트랑 가는 일 며칠 뒤로 미루는 게 좋겠네. 얼마나 급한 일인지는 모르겠네 만 내 말 무시하지 말게.”
  나는 산소 재고가 바닥나서 나트랑에 있는 공장에 가서 사오지 않으면 안된다고 설명했다.
 
  “그렇더라도 내일은 안된다니까. 내 말을 들어요.”
  “왜,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필시 무슨 연유가 있음을 짐작했다. 랑도 말렸다.

  “오빠, 아빠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오빤 여기 사정을 아빠만큼 모르잖아요.”
  “그래. 이유는 설명할 수가 없고....좌우간 내 말대로 하게. 절대로 가면 안돼.”
  랑의 아버지는 끝내 까닭은 설명하지 않고 가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그날 밤 숙소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무슨 일이 있는 것만은 틀림 없었지만 권씨와 얽혀있는 회사 업무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랑과 랑의 아버지 만류는 이내 잊어버렸다.

  다음날 일찍 나는 예정대로 나트랑을 향해 길을 떠났다. 아세틸렌 공장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사히 산소 50통을 사서 5톤짜리 트럭 뒤에 싣고 볼 일을 다 본 후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캄란을 향해 출발했다. 한 시간 정도 거리니까 도착하면 저녁 식사 무렵이 될 것이었다. 전날 밤 랑의 가족이 말리던 일을 생각하자 씨익 웃음이 머금어졌다.  남북으로 해안 쪽에 치우쳐 있는 1번 도로에는 오가는 차들이 거의 없어서 운전하기가 수월했다. 월남의 도로들은 폭이 좁았다. 1번 도로는 간선도로지만 마주 오는 차가 있으면 마음놓고 달릴 수가 없었다. 물이 괴지 않도록 도로 가장자리가 약간 낮은데다가 포장이 안 되어 있어 스콜이라도 뿌리고 난 다음에는 미끈미끈한 길 밖으로 미끄러지기 쉽상이었다.  더구나 다리는  더욱 좁았다. 마주오는 차가 있으면 다리를 통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야할 정도였다. 어떤 사람들은 월남을 오래 통치한 프랑스가 월남의 발전을 막기 위해 일부러 다리를 좁게 놓았다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닌 것 같았다. 월남 사람들은 자존심이 매우 강한 편이어서 식민통치를 한 프랑스를 틈 있을 때마다 비판하곤 했다. 한국 사람들이 일본 사람 비판하는 식이었다.  

  나는 길 양편에 있는 고무나무 밭을 구경하며 차를 몰았다. 비가 쏟아진 후여서 조심스럽게 속도를 낮추고 달리는데 맞은 편에서 수쿠터 한 대가 달려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길이 미끈거리니까 술 취한 사람이 모는 것처럼 뒤뚱거려서 보는 사람이 더 불안할 정도였다. 나는 속도를 더 낮추고 아주 천천히, 조심해서 차를 몰았다. 스쿠터도 속도를 낮추는가 싶더니 내 차와 비껴가려는 순간 기어이 쓰러지고 말았다. 부딪친 것도 아닌데 제풀에 미끄러진 것 같았다. 나는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혼다 50cc 짜리였는데 앞바퀴 쪽에 쓰러져 있었다. 그런데 사람이 없었다. 주변을 돌아보자 스쿠터를 타고 왔던 사람이 저만치 고무나무 밭으로 절뚝거리며 들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다리라도 주물러 보려고 그러나보다 했는데 오토바이를 내버려둔 채 아예 고무밭 깊숙이 사라지고 있었다. 순간 나는 머리끝이 쭈뼛거리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곳곳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어서 무슨 일이 돌발할지 예측을 할 수 없는 것이 월남이었다. 더구나 사이공 교외 쪽에서 구정공세가 시작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나는 얼른 트럭 밑으로 몸을 숨겼다. 5톤 트럭은 등치가 커서 무슨 기습을 받는다고 해도 총탄을 피할 수 있었다.   꽝!

  폭발음이 귀를 멍하게 때린 것은 거의 그와 동시였다. 머리 위의 트럭이 들썩 움직이는 것 같았다. 말로만 듣던 베트콩 게릴라들의 테러를 당한 것이었다. 이제 죽는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떨려왔다. 그러나 총성이나 폭발음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나는 감았던 눈을 뜨고 천천히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차 밑에서 기어 나와 차를 살펴보았다. 스쿠터에 시한폭탄이 장치되어 있었던 듯 트럭 앞바퀴가 터져 나가고 바퀴를 덮고 있는 펜더 근처가 엿가락처럼 찌그러져 있었다. 나는 재빨리뒷바퀴 하나를 빼내어 앞에다 바꿔 끼우고 시동을 건 후 그냥 달렸다. 등에서 식은 땀이 흘렀다. 조금만 달리면 고무 밭이 끝나고 곧바로 백마 32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거기까지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달려야 목숨을 부지할 상황이었다. 백미러를 들여다볼 겨를도 없었다. 

  타이어 하나가 빠진 뒷바퀴는 무게를 한쪽으로 많이 받아선지 얼마 가지 않아서 터져버렸다. 나는 그대로 달렸다. 트럭은 털털거리며 굴러는 갔다. 핸들이 흔들려서 온 힘을 다하여 움켜잡고 액셀레이터를 밟아댔다. 포장도로가 아니다 보니 펑크난 바퀴로 굴러가기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죽기살기로 밟아대니까 열이 나서 불이 났는지 고무 타는 냄새가 운전석까지 날아들었다. 나는 죽을힘을 다해서 32연대 정문이 있는 곳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곳까지 달려왔지만 거기서 차는 더 이상 가지 못하고 완전히 주저앉아 버렸다. 타이어는 너덜너덜하게 떨어져 날아가 버리고 쇠바퀴가 마찰을 일으켜 거기 붙어 있는 타이어 고무에 불이 나 있었다. 거기서 멈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불길이 번져 뒤에 실려 있는 산소통에라도 닿으면 연쇄폭발이 일어날 참이었다. 나는 허겁지겁 부대로 달려가서 도움을 청했다. 한국군 장병들과 함께 다시 돌아왔을 때 다행스럽게도 불은 타이어만 태우고 저절로 꺼져 있었다. 한국군 장병들은 트럭을 견인해가면서 베트콩들이 구정을 기해 곳곳에서 대공세를 펼치고 있다는 말을 들려줬다. 이른바 구정공세였다. 나는 그때 살아남은 기념으로 부대로 끌어온 트럭 타이어에 달려 있던 공기 주입구를 떼어서 한국까지 가져갔었다.

  다음날 랑의 집에 가서 폭사하지 않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얘기를 했더니 랑의 아버지가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뭐랬나. 어쨌든 다행이네. 이렇게 살아 있으니. 사실대로 말해줄 수도 없었고....그렇찮아도 무척 걱정을 했네. 아무래도 고집을 부릴 것 같았거든.”

  랑의 아버지는 베트콩의 구정공세를 미리 알고 있었지만 내게 사실대로 말해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만의 하나라도 내가 숙소에 돌아가 그 말을 전하면 베트콩들이 그들은 살려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고무나무 밭 사이를 지나올 때 공세가 임박한 시각이었던데다가 군용트럭이 보이자 고무나무 밭에 매복해 있던 베트콩이 기습을 한 모양이었다. 랑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다시 한 번 더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짜 천만다행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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