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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사자 수용기 타고 다시 김포공항으로
 
코리안보이스 기사입력  2010/11/28 [16:22]
캄란만의 돈벌이
 
알래스카 바지에 입사한지 어느 새 일년 계약기간을 채우게 되었다. 나는 계약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그 동안 쌓아놓은 신용을 믿고 밀입국한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인사과장은 별로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내가 사이공을 다녀온 이후 노동청에서도 아무런 시비가 없었던 것은 물론이었다.

  “이번에 귀국했다가 정식으로 취업비자를 받아 가지고 오려는데 좀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사실대로 털어놓은 나는 인사과장에게 부탁을 해보았다. 취업 계약서만 받아 가면 여권도 나오고 비자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뭘 어떻게 해주면 되겠소?”

  나는 얼른 내가 다시 돌아오면 고용하겠다는 취업계약서를 알래스카 바지회사 명의로 써주면 된다고 대답했다. 인사과장은 흔쾌히 승락했다.

  이제 출국하는 방법이 문제였다. 숨어 들어왔으니 나갈 때도 정식 항공편을 이용할 수가 없었다. 나의 신분을 증명할 아무런 증명서도 없이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나라를 빠져나갈 일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올 때처럼 군용기를 타고 월남을 빠져나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발각될 경우 한월 양국간에 외교문제로까지 비화할 수도 있는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위해 수송편을 마련해줄 박 중사 같은 끈이 없었다.

 나는 며칠간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궁리 끝에 일단 사이공으로 나가기로 했다. 탄손누트 공항까지는 회사에서 마련해준 여행증명이 있으니 군용기를 타는데 문제가 없었다. 사이공에 도착한 나는 주월사령부로 찾아갔다. 군인들의 수송, 여행문제 등을 담당하는 티엠오(TMO) 사무실을 무조건 찾아가 보기로 했다.

  “글쎄요..... 사정은 딱한데 우리 힘으로는 도와드리기 힘들 것 같은데요. 여기서 타는 것도 문제지만 요행히 그럴 수 있어도 서울에 도착하면 또 어떻게 나가겠어요?”

  티엠오에서 근무하는 사병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사병과 얘기해서는 결론이 날 것 같지 않다는 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뒷자리에 앉아 있는 장교를 통해야할 것 같았다. 거꾸로 생각하면 전쟁터니까 안 되는 일이 없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귀국해야 일이 정리될 판이었다. 나는 장교를 만났다. 모아둔 돈 중 얼마를 떼어서 봉투에 넣어 두었다가 슬그머니 찔러 넣어 주면서 사정을 했다.

  “월남에 눌러 앉을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이게 다 외화 벌어보자고 한 짓인데 우리 나라 사람끼리 안 도와주면 누가 도와주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부딪쳐 보면 어딘가 길이 있었다. 며칠 뒤 나는 C-46 수송기 트랩을 다시 밟게 되었다.

기내에 들어서자 썰렁한 공기가 감돌았다. 좌석은 군인들이 아니라 이역만리 남의 나라 전쟁터에서 목숨을 버린 전사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지원해서 온 사람도 있겠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전쟁 막바지인 70년대 초와 달리 대부분이 차출된 파월자들이었다. 귀향의 기쁨에 들뜬 젊은이들의 모습이어야 할 그들이 유골이 되어 좌석을 차지하고 있는 사이에 앉아서 서울까지 오려니 출국의 기쁨은 커녕 한편으로는 오싹하기도 하고 마음이 울적하기 짝이 없었다. 같이 타고 있던 주월 한국군 사령부 군수처 영현과 장병들도 서로 잡담을 하지도 않은 채 줄곧 무거운 분위기였다.

  이윽고 수송기가 김포에 도착했는지 천천히 구름을 가르며 선회하더니 고도가 점점 낮아져 덜커덩 바퀴가 활주로에 닿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기체가 활주로를 한참 굴러가다가 멈추자 장병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산하게 내릴 채비를 차렸다.

  두 번째 내려보는 김포지만 이번에는 기간이 길어선지 특별히 감개가 무량했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외우기라도 할 것처럼 열심히 창밖으로 내다보고 있는데 저만큼 앰뷸런스 두 대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문이 열리자 언제 와 있었는지 육군 군악대가 도열해 있다가 조가를 연주하는 가운데 장병들이 유골들을 하나씩 들고 앰뷸런스에다 옮겨 실었다. 그리고 마지막 두 대의 차에 분산하여 올라탔다. 나는 두 번째 차에 따라붙었다. 입국절차고 뭐고 없이 앰뷸런스는 공항을 빠져나가 동작동 국립묘지로 향했다. 노량진을 지나 명수대 언덕을 넘어 국립묘지에 도착하자 유가족들과 의장대, 군악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울음바다로 변한 국립묘지에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차창을 스쳐 가는 서울풍경을 내다보고 있자니 월남에서 보낸한 해가 마치 꿈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서울에 돌아와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  앉아 있는 그 순간이 꿈 같이 생각되기도 했다.        
 
세번째 월남행

  취업 서류를 준비해 가지고 귀국한 나는 서둘러 수속을 밟았다.  68년 7월쯤 세 번째 월남으로 날아갔다.

  알래스카 바지사를 찾아갔더니 내가 하던 보급차 운전을 필리핀 사람이 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당신이라면 아무 일이라도 시켜주겠으니 당장 나와서 일을 시작하시오” 하고 말했지만 나는 완곡히 사양했다. 기다렸다가 보급차 운전을 맡겠다고 했다. 어떻게 하든지 보급차 운전을 맡아야지 섣불리 다른 일을 맡았다가 혹시라도 그 일을 놓치면 일을 하나마나였다. 봉급 몇 푼을 먼저 받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필리핀인이 달포 정도만 있으면 기한이 차서 귀국한다니까 그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자리를 되찾아야 겠다는 것이 내 속셈이었다.

  그렇다고 기다리는 동안 아까운 시간을 허송할 수 없어서 랑의 어머니와 무슨 좋은 수가 없겠느냐고 의논을 했다. 그러자 랑 어머니는 동남아를 돌아다니며 보따리 장사를 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여행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월남에는 코끼리 이빨인 상아조각 장식품이 많았다. 상아 장식품을 태국에 가서 팔고, 태국서는 가공하지 않은 상아들을 사서 대만으로 건너갔다. 대만에도 상아에 정교한 조각을 한 것들이 즐비했다. 길거리 좌판에서 파는 기념품에서부터 제법 그럴듯한 장식품까지 다양한 상아 조각품이 널려 있었다. 나는 태국에서 산 상아들을 대만상인들에게 넘기고 보다 품질이 좋은 대만산 상아제품들을 사들여 홍콩으로 날아갔다. 홍콩에는 시계를 깔아놓고 파는 노점상들이 즐비했다. 상아제품 판 돈으로 월남에서 인기가 있는  ‘세이코’ 시계를 한 보따리 사들고 돌아가면 보따리 장사의한 바퀴 동남아 일주 여행이 끝나는 것이었다.

  물건이 가득 든 보따리를 들고 공항을 출입하기가 좀 까다로왔지만 그것도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당시 홍콩, 대만, 방콕이나 사이공 등 나의 보따리 장사 무대였던 나라들은 모두 적당히(?) 썩어 있어서 출입국에 별 애로가 없었다. 입국심사나 세관검사를 받을 때 여권에다 20불에서부터 50불짜리까지 달러를 끼워놓고 기다리면 공항 관리가 먼저 냄새를 맡고 접근을 해오곤 했다. 여권을 건네주면 쓰윽 들쳐보고 나서 거의 틀림없이 돈은 슬쩍 꺼내서 호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지체없이 스탬프를 찍어주었다.

  한 달 반 동안 보따리 장사를 하고 있노라니 필리핀 기술자가 돌아간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 즉시 알래스카 바지사에서 나를 찾았다.

  “오늘부터 당장 일할 수 있겠소?”

  역시 기다리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귀국했다가 돌아온 사이에도 계속 보급과에서 근무해온 권씨도 나와 다시 콤비를 이루게 되어 아주 기뻐했다. 귀국 전까지 권씨와 나는 서류를 변조해서 보급품을 빼돌리는 방법으로 제법 재미를 보았었는데 어느 정도 판로도 확보되고 재미가 쏠쏠할 즈음 내가 귀국하게 되자 권씨는 매우 아쉬워했었다. 나 역시 보급품 운전직을 굳이 기다렸던 것도 권씨와 함께 기왕에 확보해놓은 루트를 최대한 이용해서 재미를 보아야겠다는 속셈이었다.

  보급품에는 책걸상을 비롯 침대, 이불, 담요, 식기등 식품과 소모품들을 제외한 온갖 잡다한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가 주로 빼돌리는  품목은 1인용 모기장, 모기약, 홑이불로 쓸 수있는 침대 시트 등 어떻게 보면 시시한 것들이었다. 전쟁중이었기에 언제 어디로 피난을 떠나야 할지 알 수 없는 월남인들은 정착된 생활을 할 수 없으니까 값이 나가는 가구 같은 것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당장에 필요한 소모품들을 더 좋아했다. 처음에는 그걸 모르고 값나가는 물건을 잔뜩 빼돌렸다가 낭패를 본 적도 있었다.

  한 번은 보급창에서 짐을 싣는 동안 기다리는데 옆에 쌓여 있는 것이 눈에 띄어서 그곳을 관리하는 미군에게 그게 뭐냐고 물었다.

  “왜 좀 실어줄까? 미싱인데.”

  박스 하나를 뜯어보았더니 ‘싱거’표 미싱을 여러 대씩 들어있었다. 나는 저걸 밖으로 내어가봤자 월남에서는 인기가 없으리란 걸 짐작했다. 피난 다닐 때 그 무거운 재봉기를 들고다닐 리 없었다. 그렇지만 한국에 가져가면 돈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개만 실어 줄래?”
  내가 부탁하자마자 미군은 그걸 처분하지 못해 안달이라도 났었던 사람처럼 여러 상자를 차에다 올려 주었다. 보급창을 빠져나온 나는 곧바로 부두로 향했다. 부두에 한국 LST가 정박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걸 실어드릴 테니까 가져가서 알아서 처분하시고 돈이 되면 그중 얼마를 나눠주쇼.”

  나는 함장을 만나 단도직입적으로 찔러 보았다. 처음에는 딴 사람한테 부탁해보라면서 고개를 가로젓던 한 번만 해보라고 강권하자 마지못해 응낙을 했다. 나는 트럭에 실려 있는 박스를 배에다 부려놓았다.  석달 정도 지나자 그 함정이 다시 돌아왔다. 한국까지 다녀오려면 그 정도 걸린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어 나는 그 때를 기다렸다가 부두로 찾아갔다. 배에 오르자 상자들이 눈에 띄었다. 석달전에 실었던 미싱이 틀림 없었다.

  “아니, 왜 도로 가져왔습니까?”
  “부산에 가보니까 상륙할 방법이 있어야지요. 아무 서류가 없으니까 세관원도 어쩔 수 없더라구요. 돈도 돈이지만 미싱 한 대가 아쉬운 게 우리나라 실정 아닙니까. 공업용이니까 마산 공단에 갖다주면 그걸로 엄청난 외화를 벌 수도 있는데.... 그래서 사정을 해보았는데 끝까지 안된다는 거예요.”

  선장은 돈벌이보다는 애국심 때문에 더 미싱이 아까운 모양이었다.

  “그냥 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당신이 날 의심할 테니 할 수 없이 다시 싣고 왔지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모르겠어요. 다시 싣고 갈 수도 없고.”

  매우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나는 선장을 괜히 부대물건 도둑질에 끌어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장에게 미안했다. 미싱을 한국에서 못내린 것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선장과 나는 머리를 맞대고 미싱처리 방법을 찾았다. 보급창으로 되돌려 줄 수도 없었다. 우리는 궁리 끝에 바다 속에 처넣기로 했다. 그날 저녁 선장과 나는 땀을 흘려가며 미싱 수십 대를 캄란만 바닷물 속에다 밀어 넣었다.

  보급창에서 싣고 나올 수 있는 물건은 산더미처럼 많지만 욕심대로 실어나온대서 돈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또 한국으로 마음대로 보낼 수도 없는 형편이어서 처분할 수 있는 품목을 잘 골라야 했다. 대개는 랑의 어머니에게서 미리 주문을 받은 물건들을 트럭에 실은 채 곧바로 약속된 장소에 가서 부려놓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 물건을 싣고 아무 데나 마냥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부대에 갖다 주어야할 보급품도 섞여 있었으므로 그걸 일정시간 안에 수송해야 했고 또 월남에도 미군, 월남군, 한국군 수사기관이 군수품 부정 유출을 막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살피고 있어서 그들의 눈도 피해야 했다. 특히 백마부대 헌병대나 보안사령부 요원들은 한국인이 수송하는 보급차에 눈독을 잔뜩 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그들에게 포착되기 십상이었다.

  한 번은 자동차 타이어가 많이 쌓여 있어서 싣고 나온 적이 있었는데 월남에서는 ‘천하에 쓸모 없는 물건“이어서 남몰래 숲 속에다 버리느라고 애만 먹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언젠가 인근 지역을 지나다 보니 돼지우리 앞에 타이어를 서로 묶어서 담을 쌓아놓고 그 속에 돼지를 기르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전혀 엉뚱한 물건을 주문 받는 경우도 있었다. 철조망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철조망이야말로 부피가 큰데다가 일반 사람들에게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물건이었다.
  “철조망을 어디다 쓴다고 가져오란 거지?”

  나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랑에게 물었다.

  “돼지가 곡식을 망가뜨려서 그걸 막는데나 어쩐대나.”

  랑은 태연하게 대답을 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좀 이상했다. 철조망으로 돼지를 막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더구나 일반 철조망이 아니라 둥글둥글한 원형 철조망이었다.
  “거짓말하지 말고. 그걸 진짜 어디다 쓰려는 거지? 그냥 알고 싶어서 묻는 거야.”
  “아이구, 오빠는 몰라도 돼. 그냥 갖고만 나와요.”
  “에라, 모르겠다. 내가 그걸 알아서 뭐 하나. 네 말이 맞다.”

  나는 철조망을 싣고 안내인이 시키는 대로 차를 몰았다. 그런데 차가 자꾸만 산 속으로 산 속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나는 한편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불안한 생각도 들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되니까 잠자코 갑시다.”
  안내인은 더 이상 묻지 말라는 투로 퉁명스럽게 잘라 말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 조금 더 들어가자 정글 속에 공지가 나타났고, 거기다 철조망을 내려주자 약속된 돈을 지불했다. 그 철조망은 틀림없이 베트콩의 손에 들어갈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게 바로 월남전의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것인지도 몰랐다. 월남 사람들은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고 있었다.

  군대 보급품을 빼먹는 짓은 전쟁터라 보급관리가 엉성하기 때문이었다. 또 총알을 쏘는 것이 아니라 달러를 갖다 붓는 것이 미국이 월남전을 수행한 방식이었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미싱처럼 일년 가야 한 번 사용할까 말까한 보급품도 많아서 창고 담당자가 아무리 빼내도 표시가 나질 않았다. 그들에게 캔 맥주와 치킨을 몇 상자 갖다 안기면 물건을 실어내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인기가 좋은 품목은 송증도 이중으로 꾸미기 때문에 서류상으로도 문제가 없었다.

  보급품을 실어내려면 보급과에서 송증을 끊어가야 했는데 권씨가 품목당 여섯 매의 송장 사본 중 물건을 직접 실어주는 창고에 남겨두는 두 장과 보급창 정문 위병소에 남기는 한 장 등 세 장은 동그라미 하나를 더 붙여서 넘겨줬다. 이를테면 모기장 10장이라면 100장을 수령해다 90장을 팔아치우는 수법을 썼던 것이다. 여느 군대처럼 재고 조사를 자주 한다면 금세 들통이 나겠지만 물자가 흔한 미군인데다 전쟁터니까 재고조사도 없으려니와 있다고 해도 출고된 것과 일일이 대조하기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남의 나라 전쟁터에서 그야말로 신바람 나게 돈을 벌고 있는 판인데 어쩔 수 없이 귀국을 해야만 할 사정이 생겼다. 서울 집에 일이 생긴 것이었다. 내가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사람들은 “돈을 끌어 모으는데 왜 몇 달이나 남은 기간을 다 채우지도 않고 돌아가는지 알 수 없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한국에서 집안에 복잡한 일이 생겼다는 연락이 자꾸만 날아오니 어쩔 수가 없었다.

  “강 서방은 한몫 챙겨 가지고 가는데 나는 이거 큰 일이네, 무슨 뾰족한 수가 없을까?”
  내가 귀국하겠다니까 누구보다 섭섭해하는 사람이 권씨였다. 권씨는 사람이 똑똑하고 영어도 미국 사람 뺨치게 잘 해서 월남에서도 어느 것 하나 불편함이 없이 지내고 있었다. 미국인들과도 잘 어울려 지냈다. 그런데 포커를 좋아하여 돈이 생길 때마다 다 날려버렸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 빠져나가듯이 다 새어나가서 남은 것이라고는 푼돈뿐이었는데 파트너였던 내가 귀국한다니까 정신이 번쩍 든 것이었다.

  나는 그가 측은하게 여겨졌다.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권씨를 랑의 어머니에게 소개시켜주기로 했다. 그 말을 듣자 권씨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지만 권형, 조건이 있어요.”  나보다 나이가 위인 권씨에게 나는 항상 존대를 해왔었다.
  “아무리 돈이 급해도 랑 어머니한테는 절대로 돈을 빌리지 말아요.”

  노름에 빠진 사람들은 대개 그렇듯이 권씨 역시 수중에 있는 돈을 다 날려버리면 닥치는 대로 돈을 끌어대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급하면 랑의 어머니에게도 물건을 내다 줄 테니 미리 돈을 좀 돌려달라고 할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렇게 되면 신용을 잃게 되거나 약점을 잡히게 될 것은 뻔했다. 그는 전에도 나한테 손을 벌렸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권씨가 나에게 돈을 꿀 것 같은 예감이 들면 나는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데서 잠을 자곤 했었다. 다음날 권씨가 어제 저녁 어디 갔었느냐고 물으면 나는 시침을 뚝 떼고 “나 안 들어간 건 어떻게 알아요?” 하고 되묻기도 했다. 급전을 돌려달라고 밤중에 찾아왔다가 허탕을 친게 분명했다. 내가 돈을 빌려주었다면 그 돈마저 날려버렸을 것은 손바닥 보듯 뻔했다. 권씨는 이제 귀국할 때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으니 포커 같은 것은 더 이상 하지 않겠노라고 말했다.

  “두 번째는 한국군 헌병이나 CID 애들 만나면 아까워하지 말고 반쯤 뚝 잘라줘요. ‘여보쇼, 먹고 살자고 남의 나라 싸움터에까지 왔는데 용돈이라도 벌어 쓰자고 이러는 거 아니오? 자, 부자 나라 물자 좀 빼돌리기로 동족끼리 그러지 말고 같이 나눠 씁시다.’ 뭐 그러면서 뚝 잘라주면 그 애들이 뭐하러 건드립니까? 따지고 보면 그게 미국 군수업자들한테도 좋은 일이고.”

  그는 나이 어린 놈이 별걸 다 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마지막으로 절대로 돈을 방까지 가지고 들어가지 말라고 다짐을 해뒀다.   “그건 또 왜?”
  “잘 생각해 봐요. 반드시 밖에서 처리해야 한다구요. 숙소는 불안하잖아요. 그리고 자칫하면 소문이 날런지도 모르고.”

  그렇게 다짐을 받고나서 권씨를 랑의 어머니를 소개시켜주었다.
  “다음 주에 귀국해야할 일이 생겼습니다.”

  랑의 집에 가서 귀국하게 되었다고 말하려니까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 나는 랑의 가족들과 비즈니스 관계를 떠나 인간적으로도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어있었다. 마치 내 집 드나들 듯 그 집을 출입하였다. 나라가 다르고 말이 잘 통하지 않아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은 마찬가지였다. 랑은 말할 것도 없고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아니, 미스터 강, 아직 일년도 다 차지 않았잖아? 왜 벌써 돌아가려는 거지? 우린 좀더 연장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집에 급한 사정이 생겼어요. 내가 돌아가서 돌봐야 할...”
  그러자 랑은 아주 완강하게 나를 붙잡으려 하기도 하고 꼭 가야한다면 자기도 데리고 가달라고 사정했다. 

  “서울 언니한테는 내가 잘 말하면 되잖아, 오빠. 나 서울까지만 가면 나 혼자도 살아갈 수 있어. 한국말도 이만큼 하잖아. 월남식 찻집이라도 차리지 뭐.”

  그렇게 매달리는 랑을 떼어놓고 떠나려니 그 사이에 든 정이 너무 두터워져서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처음엔 말을 배운다고 사귀다가 어느 덧 몸을 섞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내가 랑과 동침하게된 것은 권총 때문이었다.

   랑은 아주 두뇌가 명석했다. 그 즈음 이미 한국어를 별 불편없이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랑의 방이 있는 이층은 아주 좁아서 화장실 하나가 붙어 있고 아래층으로 통하는 계단은 문이 달려 있었는데 나는 이층에 있을 때면 그 문을 반드시 위쪽에서 잠궈두곤 했다. 한국인을 싫어하는 베트콩이 침투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게릴라전을 치르고 있는 월남의 현실이었다. 나는 외출할 때도 군인은 아니지만 허리춤에 권총을 휴대하고 다녔다. 랑의 방은 일인용 침대와 걸상이 다 차지할 정도로 좁았는데 랑이 걸상에 앉고 나는 주로 침대에 걸터 앉았기 때문에 허리춤에 꽂고 있던 권총을 주로 베개 밑에 숨겨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부대에서 초콜릿이나 과자, 치킨 같은 먹을 것들을 사 가지고 랑의 집을 찾아가면 그 집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새우 같은 해산물 요리를 해놓고 기다리곤 했다.

  어느 날 밤이었다. 그 날도 랑에게 월남어를 배우고 있었는데 새우튀김 먹은 게 잘못 되었던지 배가 더부룩해서 화장실을 가게 되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별안간 총성이 울렸다. 나는 대뜸 베트콩이 왔다는 생각에 얼른 옷을 추스리고 화장실 안에서 숨을 죽이고 바깥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이층으로 올라오는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랑아, 무슨 일이냐, 문 열어!”
  랑의 아버지가 화급하게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랑의 방은 잠잠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럽게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가 아래로 통하는 문을 땄다.

  “미스터 강, 대체 무슨 일이야?”
  랑 아버지와 나는 얼른 랑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랑은 침대 위에서 권총을 들고 앉아 덜덜 떨고 있었다.   “얘, 어떻게 된 거냐?”

  랑은 우리를 보자 권총을 침대 위에 내려놓으며 자기가 잘못 만지다 발사되었노라고 말했다. 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 침대에 잠시 누우려다 베개 밑에 있던 권총이 퉁겨져 나오자 호기심에서 만지작거렸던 모양이었다. 잠시 뒤에 총성을 듣고 경찰이 달려왔으나 시의원인 랑의 아버지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돌아갔다. 한바탕 소동을 벌어지고 나서 나도 그만 일어날 시간이 되었다 싶었는데 랑이 나를 붙잡았다.

  “오빠, 오늘은 여기서 그냥 자고 가. 나 무서워서 혼자서는 잠도 못 잘 것 같아요.”
  애처로운 표정으로 품에 안겨왔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껴안으며 애무를 했다. 고이 빗은 머리결이 부드럽게 와닿으며 격정이 휘몰아쳤다. 나는 랑의 옷을 벗기고 침대에 눕혔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공개적으로 랑과 사랑을 나누었다. 그녀는 물론 그녀 부모들도 내가 서울에 가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전시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월남인들은 한국 사람들과 정조관이 다른지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지내다가 헤어지려니 얼마나 아쉬웠겠는가. 랑은 한국으로 따라가겠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내가 랑을 마음속 깊이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고백을 하자면 적당히 즐긴 셈이었다. 이국땅에서의 외로움을 달랬다고나 할까. 랑을 한국까지 데려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나는 적당히 랑을 뿌리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한 후 한 달쯤 되어 권씨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 동안 내가 일러준 대로 ‘수칙’을 잘 지켜가며 ‘일’을 해서 이제는 빚도 다 갚고 제법 돈도 모았다는 감사의 편지였다. 귀국 후 집안 일로 정신이 없던 나는 권씨의 편지를 읽으며 새삼 월남에서 보낸 시간들이 떠올렸다. 그곳에 있을 때는 지겨웠던 무더위까지도 새삼 그리운 기억으로 다가왔다. 랑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녀의 어머니는 권씨와의 사업에 어느 정도 만족스러워하고 있는지, 동료들은 차츰 다가오고 있는 계약 기간 때문에 초조해하지는 않는지.... 야자수 그늘이 그리워졌다.

  그러나 나는 곧 당장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서울의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월남에서 벌어온 돈으로 택시를 한 대 사서 굴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의치 않았다. 말썽이 많았다. 툭하면 지입회사에서 불러대는가 하면 고장이 자주 나는데다가 택시 운전수 비위 맞추느라 속이 상했다. 게다가 택시 말고 내가 자가용을 하나 구입해서 불법영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신 없이 바빴다.

  다시 권씨에 대한 소식이 들려온 것은 한 달쯤 더 지났을 때였다.

그가 선편으로 부산을 향해 떠났다는 것이었다. 파월 기술자는 오갈 때 항공편을 이용했는데 그가 부산으로 온다는 것은 강제 귀국 당하였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내가 일러준 마지막 수칙을 어겼다가 낭패를 본 것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돈 뭉치를 방으로 가지고 들어간 적이 없는데 비해 그는 성격이 꼼꼼한 편이어서 번 돈을 방안에 있는 서랍에 차곡차곡 정리해서 쌓아두었던 모양이었다.

그 돈은 미국 본토 달러가 아니라 군대에서만 사용하는 군표였기 때문에 가치가 낮아 본토불 100달러를 사려면 120달러를 주어야 했다. 트럭으로 물건을 넘기다 보면 수사대나 헌병이 냄새를 맡고 따라다니게 되는데 나눠주지도 않고 챙기니까 그들이 미군 수사대와 함께 권씨의 방에 들이닥쳐 수색을 한 모양이었다. 서랍 속에 돈이 가득 채워져 있었으니 그대로 넘어갈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훔치거나 물건을 빼돌렸다는 증거가 없어서 압수까지 당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게 아니니까 피엑스에서 물건을 사다가 밖에서 팔았노라고 둘러댔지만 결국 퇴직을 당하고 쫓겨나 비행기도 못타고 선편으로 귀국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돈을 비닐 봉투에 넣어 막사 앞 모래밭에 묻어두거나 트럭 속 어딘가에 감춰두었다가 다음날 시내 중국인 암달러상에게 가서 본토불로 바꾸곤 했었다. 권씨는 내 충고를 무시하다 낭패를 본 것이었다.

  영업용 택시 사업은 벌어들이는 돈에 비해 신경 쓰이는 일만 많더니 결국은 사고를 내고 말았다. 당시 한국의 자동차 보험은 비싸기만 했지 보험이랄 것도 없어서 사람이 다치기라도 하면 차주가 다 책임을 지다시피 했다. 내 차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결국 차를 넘기기로 하고 피해자와 합의를 보았다. 물론 사고를 낸 기사도 일자리를 잃은 것은 물론이었다. 월남에서 돌아와 택시를 구입한지 일년도 채 안 되었을 때였다.

  택시를 그렇게 날려버리자 가족의 생계는 이제 내가 몰고 있던 자가용 영업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곤드레가 된 술꾼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깨끗이 세차해놓은 날 오물을 토해 놓기도 했다. 손님들이 대단한 인물이나 되는 것처럼 거들먹을 피우며 호령을 할 때는 배알이 꼴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꾸준하게 손님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날이 갈수록 경쟁이 심해지면서 버티기가 어려워져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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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11/28 [16:22]  최종편집: ⓒ honaminworl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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