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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 하나 들고 달러 찾아 미국행
<재미동포 강신목 수기> 가짜영주권으로 진짜 시민권 받다
기사입력: 2010/11/28 [16:23]   honaminworl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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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보이스
에라, 미국에나 가자
 
  73년 11월이었다. 지난해 10월 유신이 선포된 이후 학생, 재야인사등 유신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마구 잡혀 들어가고 있었다. 그 시퍼런 서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끈질기게 박정희 정권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세월이 극도로 흉흉했다. 대학가 주변에는 데모가 없는 날에도 최루가스 찌꺼기 때문에 코끝이 매캐했다.

  베트남에서 목숨을 걸고 모았던 돈이 손바닥으로 퍼 올린 물처럼 어느 새 다 빠져나가고 없었다. 쓰기는 커녕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하고 물거품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어디가 싸움터고 어디가 후방인지도 모르는 해괴한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를 두 번씩이나 숨어 들어가서 보낸 세월이 겨우 자가용 한 대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마지막 남은 자동차 한 대에 식구들의 생계를 걸고 있던 터라 내 심사도 세월만큼이나 뒤숭숭했다. 안암동이나 봉천동 같은 데모가 잦은 대학교 주변을 일반택시 만큼 뻔질나게 드나들지는 않았지만 밤 늦게 집에 돌아오면 목이 퉁퉁 부어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또 당시 서울은 도심이고 변두리고 할 것 없이 온통 매캐한 매연으로 꽉 차있었다. 그 매연을 들이마시며 자가용 택시를 끌다보니 짜증만 났다. 그 때 우연찮게 정광수를 만났다. 정광수는 월남에서 사귄 사람으로 연배도 비슷하여 친하게 지냈다. 그 정광수가 내 인생을 또 한 번 돌려놓았다.

  월남에서 귀국한 이후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곤 하던 정광수는 내가 목숨과 바꾸다시피 해서 모은 월남 달러를 다 날리고 고생하는 걸 보기가 안 됐던지 내게 미국이주를 권했다. 지금은 미국뿐 아니라 캐나다니 호주, 뉴질란드니 하면서 심심풀이 삼아 훌쩍 이민을 떠나는 시대가 되었지만 당시의 나로선 전혀 생각조차도 못 해본 것이 미국이민이었다.

  “잘 생각해봐라. 결심만 서면 방법은 내가 알아봐 줄 테니까. 밤낮 화냥질하는 연놈들 실어 날라봐야 입에 풀칠도 제대로 못하잖아?”

  제대로 풀리지 않는 자가용 영업에 넌더리가 나 뭔가 돌파구를 찾고있던 참이어서 귀가 번쩍 트이긴 했지만 사안이 사인인 만큼 선뜻 응할 수가 없었다.

  “영어를 할 줄 아나, 기술이 있나, 그렇다고 뭉치로 가져갈 돈이 있나, 나 같은 놈이 미국 가본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어?”

  그때까지는 무슨 일이 닥치면 번쩍 머리 속에서 한 바퀴 생각이 돌아가기가 무섭게 결론을 내리고 당장 행동으로 옮기곤 했었지만 미국행 만큼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우선 미국에 대해 아는 게 없었고 겁이 났다. 월남은 한국군들도 파병되어 있었고, 목수나 트레일러 기사등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 진출했었기 때문에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지만 미국행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날이면 날마다 최루탄 가스가 자욱히 덮인 거리에서 캑캑거리며 택시를 모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또 어디 있으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뾰족하게 살아나갈 방도도 없는 좁은 땅덩어리를 벗어난다는 사실만도 다행일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자꾸만 엉덩이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어느 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미국바람이 든 것이었다. 언제 어디서 박격포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전쟁터에서도 신바람 나게 돈벌이를 했는데 무슨 일을 못하겠느냐는 자신감이 솟아나기도 했다. 미국도 사람사는 곳이니까 한 번 부딪쳐보자는 의지가 솟구쳤다.

  “미국가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정 뭐하면 거기서 택시 운전을 해도 되잖아? 누가 그러는데 뉴욕에선 택시도 벌이가 괜찮다더라.”

  정광수는 그런 식으로 나의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지금은 정광수도 미국에 건너와 있지만 그때만 해도 목공 기술이 미국에서 그토록 벌이가 좋은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정광수는 결국 내 인생을 바꾸는 계기를 만들어준 셈이었다. 월남도 소위 '해외'랍시고 거길 다녀온 후에는 살림이 어려운 것은 젖혀 두더라도 서울에서의 생활이 답답하기 짝이 없어서 싫증이 나 있던 참이기도 했다. 나는 정광수의 말에 용기를 얻고 미국행을 결심했다.

  그러나 지금도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나보다 훨씬 뒤에  로스앤젤레스에 이주해 온 정광수가 아직도 자리를 못 잡고 고생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빌딩청소부를 전전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전해듣고 뉴욕으로 불러 장사 밑천에 보태 쓰도록 몇 푼 빌려주었으나 잘 풀리질 않아 다시 서부로 돌아간 후 소식이 끊어졌다. 정광수는 자존심이 강해서 남을 도울 줄만 알았지 남에게 신세지기는 꺼리는 친구였다. 내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아직까지도 소식을 끊고 있는 것 같다.  

  좌우지간 정광수의 말을 듣고 미국행을 결심하던 날,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감과 반 평생을 살아온 땅 한국을 떠난다는 아쉬움이 뒤섞여 나는 밤잠을 설쳤다. 다음날 당장 정광수를 찾아갔다.

  "야, 나 미국 가기로 했다. 이제 뭘 어떻게 하면 되는 거냐? 우선 비행기표는 끊어야 할 테고...."

  정광수에게 결심을 털어놓고 보니 당장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비행기 삯은 어떻게 한다고 치고 이민 브로커에게 줄 돈이 없었던 것이다. 미국이 옆동네나 되는 것처럼 아무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무작정 떠나기로만 결심한 나는 정광수로 부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몹시 부끄러웠다. 나는 자동차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가진 거라곤 그것밖에 없는 데다가 떠나려면 어차피 처분을 해야 했으므로 자동차를 대신 넘겨주기로 브로커와 타협했다. 지금은 대한민국 도로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 게 자동차지만 그 때만 해도 자가용이 귀하던 때라 커미션을 제하고도 얼마간 거스름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작은 푼돈이었다.

  그렇게 해서 미국행 이야기가 오고간 지 10일 밖에 안 됐는데 브로커로 부터 모든 준비가 다 되었으니 출발하라는 연락이 왔다. 주변에서는 이웃집 마실가듯 공항으로 나가는 나를 어이없는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밀입국자와 기내식

  막상 떠날 날이 되자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를 아이들에 대한 걱정에다가 지린내가 진동을 하는 철거민촌이지만 상계동 달동네에 대한 가벼운 미련 등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종일 들뜬 마음으로 보내다가 저녁 무렵이 되어 비행기 시간보다 훨씬 빨리 공항에 나갔다. 30분을 넘게 기다리고 있자니 브로커가 나타났다. 그는 대합실 안을 휘휘 돌아다니더니 두 명의 낯선 청년을 데려왔다. 나와 함께 미국까지 그야말로 붕정만리 먼 길을 동행할 사람들이었다.

  짐이라야 옷가지를 꾸려 넣은 가방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체크인을 할 것도 없었다. 탑승이 시작되자 우리 일행은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에서 브로커는 항공권과 여권, 그리고 초청장 등 입국서류가 든 봉투를 건네주었다. 탑승객들이 길다랗게 줄을 서 있는 출국장 쪽으로 가려는데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내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강형 그런데 말이요..."
  그는 머뭇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사실은 이 초청장과 서류가 모두 가짜요. 입국은 할 수 있을 테지만 조심하슈. 당신한테만 특별히 알려주는 거니 저 사람들한테는 말할 것 없수.”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렇게 중요한 걸 출국장에 와서야 알려주다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볼따구니를 한 방 갈겨주고 싶은 마음에 주먹이 들썩거렸지만 거기서 소동을 벌였다간 비행기를 타지 못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꾹 참기로 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알려준 것만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로서야 진짠지 가짠지 구별할 처지도 못 되었으니 시치미를 뚝 떼고 그냥 떠나 보냈어도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냥 부딪쳐보는 수밖에. 쫓겨 돌아오는 한이 있어도 가보긴 해야할 게 아닌가.
             
  나는 비행기 속에서 나머지 두 사람에게도 비자를 비롯해서 입국에 필요한 서류들이 죄다 가짜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제주도도 아니고 태평양을 건너 새로운 세계를 찾아가는 길에 동행한다는 것이 보통 인연이랴 싶어서였다. 입국심사장에서 허둥지둥 당황할 그들을 모른 체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이왕 비행기는 탔으니 이판사판이다 싶었는지 생각보다는 당황한 빛을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비행기는 덜덜거리며 어둠에 잠겨있는 활주로를 굴러갔다. 4백 미터 경주 출발선에 선 육상선수처럼 비행기는 파리한 표지등들이 두 줄로 나란히 박혀있는 활주로 한쪽 끝에 버티고 서자 갖은 힘을 다해서 엔진을 돌리기 시작했다. 단내가 나도록 웽웽거리던 비행기는 가난과 최루탄 냄새에 찌든 땅덩이를 박차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으로 솟아올랐다. 손수건을 펴놓은 것 만한 창 밖으로 내려다보니 서울이 흐릿한 별 바다가 되어 멀어져가고 있었다.

  창밖에 내려다보이던 것들이 다 사라지고 비행기가 고도를 유지하자 주위가 다시 어수선해지더니 여 승무원들이 마실 것들을 실은 카트를 끌고 통로로 지나가며 "뭘 드시겠어요?" 하고 물었다. 나는 미국에 도착해서 버티려면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서 목이 말랐지만 콜라 한 잔 안 마시고 참았다. 다른 사람들이 맥주 혹은 포도주를 시켜 마시는 동안 나는 창밖에 따라오는 달을 내다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다.

  기내에 마실것들이 한 순배 돌아가고 난 뒤 한참이 지나자 승무원들이 다시 한 바퀴를 돌며 빈 컵들을 걷어갔다. 승무원들이 빈 컵들을 걷어가고 나서 잠시 후에 식사가 나왔다. 위장도 형편을 알았는지 음식 냄새를 맡아도 어쩐 일인지 식욕이 동하지 않았다.

  "손님, 뭘 드시겠어요?"

  두어가지 음식을 대면서 선택을 하라는 것이었는데 나는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다. 스튜어디스가 이상한 사람 다 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냥 지나가 버렸다. 내가 돈을 아끼려고 기내식을 안 먹는 이유를 알 턱이 없었을 터이니 아마도 양식을 싫어하는 시골뜨기 정도로 미뤄 생각했을 것이다. 기내식이 무료라는 것을 내가 안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돈을 아낀답시고 열 몇 시간을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버텨냈다.

  비행기가 샌프란시스코에 닿은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밤새껏 날아왔는데도 다시 같은 날 저녁이니 다르긴 다른 세상에 온 것은 틀림없었다.

  우리 일행은 각각 다른 줄에 서서 입국심사를 받았다. 내가 섰던 줄의 이민국 관리는 배불뚝이 여자였다. 창구에서 두어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 그어진 노란 줄 뒤에 서서 이 줄을 무사히 넘어가면 진짜 미국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조마조마 해지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담담해졌다. 이민국 직원은 내가 내민 가짜 초청장을 들여다보며 뭐라고 묻더니 내가 머뭇거리자 대답도 듣기 전에 꽝 하고 여권에 입국허가 도장을 찍어줬다.

  너무 쉽게 입국심사대를 통과하자 뒤통수가 시큰시큰할 정도로 불안해졌다. 당장이라도 뒤에서 누가 목덜미를 낚아챌 것 같은 불안한 마음에 나는 뛰다시피 입국장을 빠져나왔다.
 
  대합실 구석에 앉아 아직도 쿵쿵거리는 가슴을 달래고 있으려니 두 명의 동행자들도 상기된 얼굴로 나타났다. 나도 미국 천지에 아는 얼굴 하나 없었지만 그들도 혈혈단신이긴 마찬가지였다. 이제 입국은 했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미국말로 정말 '노 아이디어'였다. 그들도 처지가 나만큼 답답했던지 미국에 도착하면 어디로 가겠다거나 거기서 무엇을 해서 살아가겠다는 계획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일단 가서 보자는 것이었으니 말하자면 '무작정 상경'이 아니라 '무작정 도미'인 셈이었다.

  우리 일행은 한 30여분 동안 우왕좌왕하다가 서로 결정을 내렸다. 나는 막연하게나마 당초 목적지로 삼았던 뉴욕으로 떠나기로 했다. 아무래도 제일 큰 도시니까 택시운전 말고도 벌어먹고 살 기회가 그만큼 많을 것이라고 생각됐기 때문이었다. 두 명은 얼른 마음이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과 헤어졌다.

  지금은 무슨 비행기였는지도 생각이 안 나지만 나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손짓발짓으로 물어서 뉴욕행 대륙횡단 비행기를 탔다. 나중에 들으니 두 사람은 내가 떠나고 나서도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서성거리다가 수상하게 여긴 이민국 직원에게 붙잡혀 추방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사람들이 지독하기는 정말 지독한 것 같다. 두 사람 모두 그 후에 다시 밀입국, 그 중 한 명을 뉴욕에서 만났다.

  어쨌든 미국대륙은 참으로 광활했다. 비행기는 밤을 꼬박 새우고 나서야 말로만 듣던 뉴욕의 존 F 케네디 공항에 도착했다. 나는 길고 긴 통로를 이리저리 돌아 누가 정답게 맞아주기나 할 것처럼 출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들을 휘휘 둘러보며 대합실로 나섰다. 영어로 꼬불꼬불 갈겨 쓴 종이 팻말을 들고 서 있는 사람, 나오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서있는 사람 등등, 마중객들을 헤쳐 나오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누군가 “어이, 먼길 오느라고 수고 많았다!”하며 금새 어깨를 툭 치며 달려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런 기분이 착각이 아니었다. 구레나루가 시꺼먼 녀석이 정말 내 어깨를 툭 치며 뭐라고 지껄였다. 눈치로 때려잡아보니 “뉴욕시내, 뉴욕...얼마면 된다” 뭐 그런 얘기 같았다. 나는 별 의심도 없이 반가운 마음에 그 녀석을 따라갔다. 큼지막한 승용차가 막 떠오른 햇빛에 번쩍거리고 있었다. 나로서는 난생 처음 타보는 호화판 승용차였다. 서울로 치면 소위 '자가용 택시'쯤 되는 모양이었다. 뉴욕에도 자가용 택시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차라리 친근감이 느껴졌다. 길을 배운 뒤에 자동차 살 돈만 마련되면 이 짓을 다시 해먹어도 좋겠다는 생각도 스쳐갔다. 운전석에 앉아 열심히 핸들을 돌리고 있는 구레나루와 미래의 내 모습을 바꿔놓고 상상을 즐기자니 마음이 제법 차분해졌다. 그러자 바깥을 휙휙 스쳐 가는 뉴욕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우선은 세계 제일이라는 도시가 그토록 지저분한데 놀랐다. 도로변에는 너저분하고 볼품없는 건물들만 스쳐갔다.

  “디스...이즈...뉴욕..?”

  나는 그 녀석이 나를 엉뚱한 곳으로 끌고 가는 건 아닌가 하는의심도 들었다. 운전사 녀석은 뭐, 퀸즈, 어쩌고 하고 대답했는데 확실히 들은 것은 “노우”라는 말뿐이었다. 예스면 예스고 노우면 노우지 말을 길게 빼서 나를 당황하게 만든 그 운전수의 뒷퉁수를 쳐다보았다. 나는 좀 찜찜했지만 촌놈같이 보였다간 진짜 변을 당할지도 모른다 싶어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딱 부러지는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디든 가긴 가고 있지 않은가.

  아닌 게 아니라 잠시 뒤 고층빌딩들이 빽빽이 들어찬 거대한 도시가 영화장면처럼 저만치 눈앞에 떠올랐다. 설명이 없어도 그 위에 장엄한 모습으로 우뚝 솟아있는 것은 말로만 듣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임을 알 수 있었다.

  드디어 뉴욕에 오긴 왔구나. 나는 뉴욕 거리에 서있는 자신의 모습이 비친 휘황한 쇼윈도우를 들여다보며 마치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나 한 것처럼 꿈만 같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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