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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홈레스가 따로 있나
 
코리안보이스 기사입력  2010/11/28 [16:27]
한국에서는 가족들이 그런 형편도 모르고 생활비가 없다는 전갈을 계속 보내와 나를 더욱 괴롭게 했다.
그 때쯤인가. 나를 미국에 보내준 친구한테서 인감증명을 떼어 줘야겠다는 연락이 왔다. 커미션 대신 주고 온 자동차 명의를 바꾸는데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급히 떠나다 보니 자동차 열쇠와 정기 검사증만 넘겨주고 왔으니까 당연한 요구지만 나는 울화가 치밀었다.
"야, 여기 와보니까 영주권이란 게 없으면 취직도 못하게 되어 있는데 무작정 보내만 주면 어떡하냐? 넌 여기 와 보았으니까 그런 거 다 알았을 거 아냐."
홧김에 퍼붓긴 했지만 그래 보았자 사정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아이크 박에게 그만두겠다고 얘기했다. 예의 그 협박을 되풀이했지만 나도 갈 때까지 가보겠다고 버텼다.
“당신 갈 데는 있는 거야?”
그는 윽박지르듯 물었다. 사실 갈 데는 없었다. 나는 찾아보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럼, 잠자리는 있나? 나는 자선사업가가 아니니까 그만 두고 나면 당신한테 공짜 잠자릴 제공할 수야 없잖아.”

나는 문자 그대로 길거리에 나앉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로 보따리 하나를 챙겨 가지고 나서니 갈 곳이 막막했다. 하릴없이 거리만 헤매다가 밤이 되면 다시 베이욘의 공원으로 가서 이슬을 맞으며 잠을 잤다.

사흘째 되는 날인가.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일자릴 구한답시고 돌아다니던 끝에 주유소에서 일하고 있는 강덕보 씨를 만났다.
“강씨, 어제 베이욘 경찰관을 만났는데 공원에서 노숙하는 동양인이 있다고 하던데 강씨 아니오?” 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날 아침 순찰 돌던 경관이 차창을 열고 뭐라고 소리치던 것이 생각났다.
강덕보 씨는 “다시 공원에서 자면 잡아가겠노라고 경찰이 말합디다”고 일러줬다.
“정 뭐하면 우리 집이 비좁지만 일자릴 구할 때까지 당분간이라도 쓰시오. 이판에 뭐 눈치코치 볼 거 있소?”

가난한 사람이 더 인정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아파트는 방 하나가 딸린 원룸 스튜디오인데 동생과 둘이서 기거하고 있었다.
강씨 덕분에 일단 밤이슬은 피하게 되었지만 따지고 보면 아무 상관도 없는 그의 집에서 마냥 신세를 질 수도 없는 일이고 하루 속히 반값이라도 벌 곳을 찾아야 했다. 거실에는 강씨의 동생이 자고 거실과 이어지는 부엌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으니 옹색하기 짝이 없기도 했다.
뾰족한 수도 없이 일자리를 찾는답시고 다음날 하루 종일을 헤매다가 밤이 되어서야 몸과 마음이 허탈한 상태가 되어 강씨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가 보기에도 허탈해 보였던지 그는, 식사는 했느냐고 물었다.

"강 형, 내일은 나하고 저 위에 있는 공장에 한번 가 봅시다. 「리퍼블릭 컨테이너」라고 박스 만드는 공장인데 그 회사 공장장을 좀 알거든요. 토니라고, 거 왜, 우리 주유소에 자주 오잖아요?"
토니라면 나도 얼른 얼굴이 떠오르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좋아 보여서 가끔씩 휘발유를 덤으로 넣어준 적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낮에 저지시티에 있는 공장들을 기웃거리다가 「리퍼블릭 컨테이너」라는 회사를 지나친 것도 생각이 났다. 공장도 제법 크고 공장 옆에 붙은 야적장에는 화물선에 싣고 다니는 컨테이너가 십여 개가 훨씬 넘게 줄지어 서 있는 것이 어딘가 활발해 보였기 때문인지.

다음 날 강씨와 함께 「리퍼블릭 컨테이너」를 찾아갔더니 사장이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무슨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말이 콱 막혀버렸다. 미국 와서 해본 거라곤 기름 넣어주는 일밖에 해본 게 없고 기술이라곤 택시운전이었는데 그거야 자동차 천지인 미국에서 기술도 아니었다. 나는 우물쭈물 대다가 “청소도 좋고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고 엉겁결에 답했다. 그런데 그는 “청소? 그걸 해봤어요?”하고 되묻는 것이었다. 청소를 해보고 안 해보고가 있으랴 싶어 잘못들은 거겠지 생각했다. 나는 무조건 “예스”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럼 내일부터 나오시오. 소셜 시큐리티 카드 가져오는 거 잊지 말고.” 하며 쉽게 승낙을 했다.
강씨는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쇼셜 시큐리티 카드는 우선 내 걸 가져가서 보여줘요."하며 자기 사회보장카드를 빌려주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까다롭지가 않아서 사회보장카드도 우편으로 신청만 하면 내어준 모양인지 강씨가 신청해준 카드가 불과 열흘만에 발급되었다. 다음날 출근하니 늙수그레한 여자가 화장실부터 사무실, 공장 여기저기를 데리고 다니며 청소를 하라고 시켰다. 공장이 크다지만 한나절 걸릴 일도 아니었다.

일단 끼니는 이어나갈 만한 일자릴 구한 셈이었다. 한숨을 돌리고 나면 그럴듯한 직장도 나서겠지 하는 기대도 생겼다. 어릴 적부터 생존자체에 대한 위기를 수없이 겪어온 터라 웬만해서는 낙망하지 않고 살길을 찾다보니 그래도 작은 해결을 본 것이었다.

사람들도 인심이 좋아서 특히 스텐리 사장은 자기 여비서를 시켜서 매일 조금씩 내게 영어를 가르치게 했다. 일은 죽어라고 열심히 했으니까 그만 하면 됐는데 영어가 안 되니까 의사소통이 잘 안 되어서 불편했던 모양이다. 출근이 7시였는데 나와 여비서는 6시39분까지 출근해서 반시간 동안 영어공부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다음 날 직접 확인해 보고 새로 배운 단어를 알고 있으면 두 사람 모두 30분 추가근무 수당을 지급하겠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수당을 받으면서, 그것도 젊고 어여쁜 여성에게 영어를 배우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취직도 하고 영어도 배우고 금발 여성과 새벽에 단 둘이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는 그야말로 '1석3조'의 행운이었다.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던가. 어느 날 공장 뒤꼍을 청소하다보니 두 명의 젊은이가 널판자를 썰어 팔레트란 것을 짜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눈이 번쩍 틔었다. 팔레트란 게 짐을 실을 때 밑에 대는 받침으로 간단하게 짤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명은 장난하듯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나는 사무실로 공장장을 찾아갔다. 잘하면 청소일을 면할 수 있는 찬스였다. 나는 어려운 생활을 해오면서 기회에는 강한 편이었다. 앞뒤 생각 할 것 없이 우선 부딪쳐보는 성미였다.

“저 뒤에서 팔레트를 짜고 있던데 둘이서 하루에 몇 개나 짭니까?”
공장장은 청소부가 그걸 왜 물어, 하는 표정으로 멀거니 나를 건너다봤다.
“내가 그걸 짜보고 싶어서 그럽니다.”
그는 “네가 그 일을 할 수 있다고?”하면서도 청소를 해놓고 남는 시간에 짜보라고 허락을 했다. 나는 부리나케 청소를 해치우고 뒤꼍으로 달려가 판자를 길이대로 좌악 짤라놓고 뚝딱거리며 팔레트를 만들어댔다. 몇 시간만에 다른 목공들이 만든 숫자를 따라잡았다. 미국은 연장이 좋으니까 그 정도는 식은 죽먹기였다. 옆의 녀석들은 여전히 꿈지럭거리면서 나를 보고 투덜댔다. 천천히 해도 같은 돈을 받을 건데 숨가쁘게 설쳐대는 꼴을 보고 얼이 빠진 녀석이라고 비웃는 것이었다. 어쨌던 나는 퇴근 무렵에 와본 공장장을 놀라게 했다. 다른 두명이 종일토록 50여개를 겨우 만드는데 나 혼자 오후에만 40여개를 짜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나는 다음날부터 청소 대신 아침부터 팔레트를 짜게 되었다.

일은 수월해졌지만 벌이가 시원찮은 것이 문제였다. 방세를 내고 나면 간신히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였으니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보낼 여유가 전혀 없었다. 결국 부업이랄까, 미국식으로 말하자면 '투잡'(TWO JOB)을 뛸 수밖에 없었다.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하켄색이란 곳에 있는 봉투공장에 일자리를 구했다. 저녁 7시부터 새벽 3시까지 야근조였다. 그것도 같이 일하던 동료의 소셜 시큐리티 번호로 속이고 취직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이름으로 일도 하고 세금을 내게 되는 셈이었다.
그러자니 잠잘 시간이 없었다. 새벽3시에 일이 끝나고 자주 다니지도 않는 버스를 타고 반 시간은 걸려 아파트에 돌아오면 4시가 되니 두어 시간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다시 공장에 나가야 했다. 석달 동안 그 짓을 하고 나니 코피가 터지고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 공장에서는 별로 오래 일하지 못하고 나왔다. 임금이 시원찮기도 했지만 새로운 일감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당시 저지시티에는 시브 애브뉴에 미아식품이란 동양식품점이 있었는데 자연 한국사람들은 그 가게를 주로 이용했다. 70년대초 저지시티에 사는 한국인들은 대개 간호원들로 남편들은 변변한 일자리가 없는 경우가 많아서 시장도 남편들이 보게 되었다. 식품점에서 만나면 시간이 많은 사람들이라 선지, 교포들이 귀하던 때라 선지 지금처럼 본체만체 헤어지는 게 아니라 어떻게 미국에 왔느냐, 한국에서는 뭣했느냐 등 반갑게 얘기를 나누는 게 보통이었다.
거기서 나도 몇몇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교회에 가서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어느 날 그 식품점에 갔더니 제일교회 이동필 장로란 분이 목수를 찾고 있으니 연락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연줄이 되어 나는 이 장로 댁에 가서 부엌 고치는 일을 해주게 되었다.
“당신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 아예 때려치우고 목수 일로 나서지 그래요. 미국에선 그게 벌이가 괜찮아요. 공장 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거요.”

품삯은 미리 얘기된 것이 없으므로 그가 주는 대로 받았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았다. 미국에 와서 그런 돈을 만져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적게 준 것이니 앞으로는 그렇게 받지 말고 많이 부르라고 일러주었다. 그가 이 집 저 집을 소개해준 것을 시작으로 해서 여기저기 입에서 입으로 “한국 사람 목수가 있다”는 얘기가 퍼지고 인근 교회의 목사님 댁을 비롯, 일감이 들어오게 되자 굳이 몇 푼 안 주는 공장은 나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 공장에서는 그것도 모르고 사표를 내자 금세 주급을 올려주며 붙잡았다. 그 동안 친절하게 대해준 것도 그렇고 해서 박절하게 잘라버리지 못하고 두어 주일 더 나갔는데 그 사이에 또 한번 주급을 더 올려 주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몇 달 동안의 악몽 같은 초기 미국생활이 마감되고 본래의 직업인 목수 일을 되찾게 됐다. 나는 헌 자동차도 한 대 구입해서 옛날 을지로에 있던 「형제목공소」 이름을 써 붙이고 다녔다. 경쟁이 없으니 교포사회의 일은 도맡아서 하다시피 했다.  

꼭두새벽에 일을 해달라고 전화를 받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다. 한참 단잠에 빠져있는 서너 시경에 당장 와달라는 호소(?)를 못 이겨 달려가 보면 밤손님이 다녀간 뒤였다. 경찰과 집으로 연결되어 있는 경보장치가 울려 튀어나온 가게 주인은 분노와 허탈감이 뒤얽힌 표정으로 엉망진창이 된 가게를 지키고 있기가 일쑤였다. 망가진 가게 출입문을 출근시간 전까지 임시변통으로 손봐달라는 것이니 외면할 수도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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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11/28 [16:27]  최종편집: ⓒ honaminworl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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