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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목수에게 비친 미국
 
코리안보이스 기사입력  2010/11/28 [16:27]
내가 뉴욕의 교포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74년 겨울부터였다.
햇볕이 따뜻하게 문틈으로 새어들어 오던 어느 날 오전. 작업준비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그 시간에 찾아올 만한 사람이 없던 터라 혹시 이민국 직원이라도 덮친 것인가 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 자신은 물론 함께 일하던 목수들이 모두 가짜 선원증으로 입국한 불법 체류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도망칠 생각도 잠시 했지만 일단 부딪쳐보자는 배짱으로 문을 열었다. 찾아온 사람은 뜻밖에도 뉴욕한국일보의 조 기자였다.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목수인 나를 취재한다는 것이었다. 그 때만 해도 교포사회라야 손바닥만했으니 나 같은 사람까지 취재 대상이 될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를 따라온 예쁘장한 여기자는 나를 밴 앞으로 데리고 가서 사진을 찍고 법석을 떨었다.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신문에까지 내 이야기가 오르는 호강을 하게 됐는데 나는 그때 신문의 위력을 처음으로 체험했다.

'어느 목수에게 비친 미국'이란 제목의 인터뷰 기사가 나가자 일감이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보다 더 효과 있는 광고가 없는 듯 싶었다. 나는 거기서 힌트를 얻어 한국일보를 찾아갔다. 「형제목공소」라는 조그만 안내광고를 싣기 위해서였다. 요즈음은 신문마다 업소안내 광고가 여러 페이지까지 되지만 당시로서는 그런 게 없었으니 뉴욕 교포신문의 안내광고로는 내가 첫 광고주인 셈이다. 목수라곤 뉴욕일대에서 나와 정모씨를 비롯, 서너 명에 불과할 정도였는데 나는 그 신문기사와 광고 덕분에 얼마되지 않아서 21명의 식구를 거느리는 규모로 자라났다. 나는 마이애미에 연락해서 사람들을 뉴욕으로 불러 올렸다. “일자리는 내가 책임질 테니 보내기만 하라”고 큰소리를 쳐댔다. 일을 시켜봐서 목수 자질이 없다 싶으면 교포들이 운영하는 가게에 소개시켜 주었다.

지금 뉴욕일대를 거의 독차지하고 있는 한인 야채상, 청과상들은 그때부터 막 생겨나기 시작했었다. 또 가발업이 한창 붐을 이룰 때라 소규모지만 주로 가발을 파는 한인 잡화가게도 수월찮게 늘어갔다. 목수로서 점포를 꾸미러 다니니까 누가 가게를 새로 여는지 정보가 훤했고 새 점포에는 으레 사람이 필요하게 마련이니까 본의 아니게 직업소개소 노릇을 한 셈이다. 아무튼 “형제목공소는 일도 잘하지만 사람도 잘 구해온다”고 대환영을 받았다. 마이애미에서 사람이 모자라면 한국에도 연락했다.

“꼭 목수가 아니라도 괜찮다. 돈벌이가 많으니까 어떻게든 건너보내기만 해라. 오는 방법까지는 모르겠다. 나도 불법으로 들어왔으니까.”
내 동생 신종이 미국으로 온 것도 그 무렵이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마(魔)가 끼게 마련이라고 좋은 시절이 마냥 계속되진 않았다.

77년 6월. 춥지도 덥지도 않고 일하기에는 안성맞춤인 날씨였다. 맨해튼 브로드웨이의 지금 「VIP」잡화가게 자리에 「한일종합상사」가 들어서게 되어서 이 점포의 내장공사를 형제목공이 맡았다.  한 이틀정도 마무리작업을 남겨놓은 날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한꺼번에 여럿이 와아 달라붙어 후닥닥 일을 해치우는 스타일이라 그날도 일하는 사람이 열댓 명은 넘었다. 나는 대강 작업지시를 끝내놓고 일꾼들이 목재를 부리는 동안 밴에 올라앉아 깡통에 든 콜라로 목을 축이고  있었다. 아직 이른 아침인데도 거리는 복작거렸다. 교포행상들이 가발을 씌운 스티로폴 머리를 막대기에 꽂아들고 흔들어대며 파는 모습도 보였다. 길거리에는 휴지 조각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음식을 담았던 일회용 그릇들이 제멋대로 뒹굴고 있었다. 세계최고로만 알고 있었던 일등도시 뉴욕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그래도 깨끗해진 편이다. 잠시였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그런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만큼 여유가 생긴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기는 미국에 온 후 그 동안 지나간 세월은 줄곧 살아남기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남들처럼 한가한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거리 모습 같은 것도 그러니까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취미랄 것도 갖지 못했고 당구니 바둑이니 하는 잡기도 할 줄 아는 게 없다. 요즈음에 와서야 내가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려니 겨우 고스톱인가 뭔가를 배웠고 골프를 배우기 시작한 것도 몇 해 되지 않았다. 이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니 건강관리도 좀 하라는 주위의 권유에 떠밀려서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베이욘의 공원에서 이슬을 맞으며 노숙했던 때를 생각하면 정말 꿈이라도 꾸고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가게 앞에서 대여섯 명의 백인들이 오락가락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자재를 나르고 있는 우리 사람들을 가리키며 뭔가 수군거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나는 그들이 전기공사를 나온 사람들일 거라고만 짐작했다. 옷차림도 대개 허술한 잠바차림이어서 별로 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일꾼들은 자재를 다 내려놓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연장을 챙기고 있었다.
“미국사람들은 전기 공사하는데 무슨 사람을 저렇게 많이 쓰나” 하는 생각을 할 즈음, 자기네끼리 신호가 있었는지 별안간 이들은 가게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중 한 명이 문을 막아서는가 싶자 나머지는 목수 두어 명씩의 허리춤을 낚아채 가게 한쪽으로 몰았다. 내가 밴 에서 내려서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우리 사람들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이들이 이민국에서 나온 사람들이란 것을 직감했다.

본능적으로 '튀자!' 하는 생각이 스쳐갔지만 종업원들이 체포되는 걸 보고도 나만 그대로 줄행랑을 쳐야할지 얼른 판단이 서질 않았다. 도망을 안 쳐봤자 같은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뾰족한 수도 없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숨을 한번 깊이 들이마시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되지” 하는 배포였다. 문을 막고 지키고 있던 이민국 직원이 비켜서며 “네가 여기서 보스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길가에 세워둔 밴을 가리키며 “저게 네 전화번호냐”고 다시 묻더니 부하에게 전화를 걸어보라고 지시했다. 밴에는 한글로 「형제목공」 그리고 영어로 “Kang & Korea”에서 따온 「K & K」라는 간판이 전화번호와 함께 적혀 있었다. 나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있는 일꾼들에게 “영어를 모른다고 하고 내게 맡기시오”라고 일렀다. 지휘자인 듯한 이민국 직원이 내게 한국말을 쓰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나도 영어가 시원찮지만 이 사람들은 영어를 전혀 못하니까 어쩔 수 없잖소”하고 되받았다. 그때 먹을 것과 콜라 등을 사 가지고 돌아온 동생 신종이 영문도 모르고 들어섰다.
”당신도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오?“
“예스”
“그럼 저쪽으로 가서 같이 서시오!”
말하자면 우리 팀이 일망타진된 셈이었다. 지휘자가 모두 영주권을 제시하라고 명령했다. 나는 “집에 두고 왔다고 말해요”라고 일렀다. 상대방이 한국말을 못 알아들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턱이 없었다.
“일하러 오는데 무슨 증명을 가지고 나오겠습니까? 다들 집에 두고 왔답니다.”
“그럼 당신이 열쇠를 모아 가지고 가서 픽업해 오시오 .”
“부인들이 모두 일을 나가고 없어 가봐야 소용이 없어요”

이민국 직원은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왔으니 쓸데없는 생각은 않는 게 좋다고 엄포를 놓았다. 나는 버틸 때까지 버텼다. 그는 그렇다면 모두 이민국으로 연행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왕에 내친 결이라 나는, “이 사람들을 모두 데려가면 한 이틀 남은 공사를 못 마치는데 이 가게를 못 열게 되면 그 손해를 이민국이 변상할거냐”고 대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가게 밖에는 무슨 사건이라도 터졌나 하고 구경꾼들이 빽빽하게 몰려 서서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목공소에 전화를 걸었던 직원과 잠시동안 뭔가 얘기를 하더니 “당신이 이 사람들을 3일뒤 이민국에 출두하도록 보증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좋다고 답했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겠지만 그는 노란 색의 출두명령서를 나눠주고 우릴 놓아줬다. 나까지 불법 입국자란 건 의심조차 않는 모양이었다. 그 무렵만 해도 미국은 그만큼 순진한 편이었다.
그래서 일단 당장의 위기는 넘겼다. 그 공사를 끝내고 일꾼들에게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의논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은 동생과 다른 한 명 뿐, 모두 도망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시 뉴저지 한인회장이던 이동필씨를 찾아가 그와 함께 엘리자베스 시에 있는 변호사를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들은 변호사는 “당신은 영주권이 있어요?”하고 물었다. 나는 이동필씨를 보면서 없다고 대답했다.

“그럼 비자는 무슨 종류요? 어디 여권을 좀 봅시다.”

그땐 지금처럼 여권기간을 길게 줄 때가 아니라 내 여권은 오래 전에 무효가 되어 있었고 그나마 나는 가지고 가지도 않았었다. 이동필씨의 설명을 들은 그는 빙긋이 웃으면서 “여러 말 할 것 없이 어딘가로 숨으시오”라고 일러줬다.  결국 우리들 중에 유일하게 영주권을 가지고 있던 김 목수와 귀국을 작정한 두 명을 제외한 13명이 뿔뿔이 흩어져 잠적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당시 뉴욕의 교포신문들은 우리 기사로 연일 지면을 메웠던 모양이다. 지금처럼 교포사회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뉴스거리가 없기도 했겠지만 백주에 6명의 이민국 직원이 기습해서 대대적인 단속을 하기는 교포사상 그 때가 처음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점심시간이 가까웠던 때라 구경꾼들이 많이 몰려들자 때마침 지나가던 뉴욕타임스 기자가 현장을 취재한 후 당시 49가 5애브뉴에 있던 한국일보에 연락, 이 신문이 소위 '특종'을 잡았던 것도 그 사건이 크게 보도된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교포신문사에서 뉴욕에서는 전례 없는 그같은 대규모 기습 단속이 특정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이 아니냐고 이민국에 단속의 배경을 확인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민국은 차별은 당치도 않고 제보를 받았으며 신고자의 신원은 알려줄 수 없다고 해명했다는 것이었다.

누가 신고를 했는가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지만 당시 점포의 주인이었던 박모 씨는 자신의 경쟁업자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제의 박 씨 점포는 당시 브로드웨이에 있었던 다른 교포 가게들보다 두 배가 넘는 규모였기 때문에 공사 전부터 다른 업소들을 긴장시킨 것이 사실이었다. 공사비도 3-4만 불에 이르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로서는 제법 큰돈이었다.
내가 공사를 맡았다는 소문이 나돌자 어느 날 그 주변에 가게를 갖고있던 교포 네댓 명이 나를 바로 옆 블록에 있던  「갈비하우스」란 한국식당으로 불러냈다. 그들은 아직 공사계약이 안 되었으면 그 일을 맡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당시만 해도 누가 누군지 빤한 교포사회에서 논란이 많은 공사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다음날 그 얘기를 전해들은 박씨도 입장이 난처하다면 미국 목수에게 일을 줘도 되니 부담 가질 것이 없다고 오히려 날 위로했다.

그러나 그것도 정해진 운명이었는지 이웃 교포상인들이 다시 나를 불러 “당신 아니라도 어차피 공사는 할 건데 괜스레 남의 일감만 뺏는 결과가 될 뻔했다. 우리 부탁은 없던 걸로 하고 예정대로 일을 하시오”라고 자신들이 다시 의논한 것을 알려줬다. 지금은 무슨 업종이 좀 된다는 소문이 나면 같은 한인끼리 바로 길 건너편에 코를 바짝 들이대고 보아란 듯이 같은 업종의 가게를 차려 서로 피가 튀는 경쟁을 일삼는 지경이 되었지만 그 때만 해도 남의 처지 생각도 할 줄 아는 인정이 조금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당시 밀고한 사람이 그쪽보다는 목수 경쟁자였을 것으로 믿고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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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11/28 [16:27]  최종편집: ⓒ honaminworl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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