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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미군 5개월만에 훈련 마치다
 
코리안보이스 기사입력  2010/11/28 [16:29]
훈련자체는 이미 한국군으로서 3년 근무를 마친, 그야말로 '베테랑'이라 어려울 게 없었다. 나이는 서른 아홉 살이나 됐지만 (영주권을 낼 때부터 입대허용 연령인 35세로 속였다) 동양인은 어려보이는데다 체력도 아직 남만한 때라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실 그런 것들이야 모두 마음가짐에 달려있는 게 아닌가 싶다.

문제는 말이었다. 모든 것이 영어였으니 이만저만 애로가 아니었다. 점호 때는 한국군으로 치면 '보초수칙'이니 '군인 정신'이니 하는 잡다한 것들을 수없이 외우고 읊어야 하는데 의미도 모르거니와 읽을 줄도 몰랐다. 직속상관 관등성명조차도 쉬운 것이 아니었다.
“캉(KANG), 넌 벌써 다 외었냐?”

부지런히 외우던 동료들이 멍하니 앉아있는 내게 걱정스런 얼굴로 묻곤 했다.
“어...? 으응... 나, 좀 있다가 외워야지.”

나는 이놈들이 무시하지나 않을까 해서 곤혹스러웠다. 나는 별 수 없이 친구가 별로 없는 녀석을 골라 일과 후 피엑스로 불러냈다. 맥주나 먹을 것을 사주고 녀석을 꼬드겼다. 돈은 가져간 게 있어서 풍부했다.

“너희가 써놓은 영어는 읽기가 어려우니까 천천히 좀 읽어봐라”

나는 그걸 한글로 발음 나는 대로 받아 적어 놓고는 불침번을 서는 동안 죽어라고 외었다. 뜻도 모르면서 외우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아 점호 때는 작은 종이쪽지에 적어 손바닥에 쥐고 위기를 넘겼다. 여차하면 몰래 훔쳐보기 위해서였다.

훈련소에서는 웃지 못할 뒷얘기가 참 많았다. 말이 안 통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때까지 40년 가까이 살아온 것과는 모든 것이 생판 낯선 일 뿐이었으니까 당연하기도 했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무더운 날씨라 해이해져 있는 훈련병 군기를 잡는다면서 중대부관이 관물검사를 시작했다. 그게 한바탕 소동의 시작이었다.

뉴욕을 떠나올 때 나는 목수 일을 해서 저축했던 돈을 찾아 줄곧 지니고 다녔다. 그 동안 쓴 돈을 빼고도 2만여 불 됐으니 당시로서는 꽤 큰 액수였다. 더구나 현금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받은 편지봉투에 백 불짜리를 몇 장씩 나눠 넣은 후 소위 007백에다 고이 모시고 다녔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은행에 예금해두면 되는 걸 그랬지만 당시에는 모든 것이 불확실했기 때문인지 그럴 생각을 못했다. 그래서 나는 현금가방을 베고 자거나 침대 속에 넣어두고 낮에는 관물 캐비넷에 깊이 넣어두고 기회 있을 때마다 몰래 확인을 하곤 했다.

내 차례가 되자 부관은 관물 캐비닛을 열어보라고 명령했다. 역시 여군 중위라선지 부관은 까다롭게 굴었다. 그러나 나도 왕년의 실력이 있는지라 내 관물은 두부를 잘라놓은 것처럼 반듯반듯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문제는 옷 뒤에 숨겨놓은 돈 가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지휘봉으로 가리키며 “그게 무슨 백인가?”하고 물었다. 나는 고향에서 보내온 가족들의 편지를 모아놓은 것이라고 둘러댔다. 여군장교는 내용물을 꺼내보라고 지시했다. 나는 어쩔 수 없다 싶어 가방을 열어 보였다. 위장을 위해 넣어둔 잡다한 물건들과 함께 봉투들이 빼곡이 차있었다. 그녀는 그대로 지나가지 않고 허리를 숙여 직접 그것들을 뒤져보다가 얼굴 색이 변했다. 봉투 속의 현금을 발견한 것이다.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어, “다른 봉투도?”하고 묻더니 내가 “예스”라고 답하기가 바쁘게 가방을 도로 덮고 한 발짝 물러서며 권총을 빼들었다. 그녀는 권총 노리쇠를 철컥 소리가 나게 후퇴시키며 머리높이쯤으로 들고는 “전체, 차렷!”하고 벽력같이 소리쳤다. 온 내무반이 바짝 긴장해서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장진된 M-16을 가져와!”
영문을 모르는 내무반장이 그야말로 눈썹이 휘날리게 중대본부로 뛰어가 총을 들고 왔다. 선임하사가 황소 눈방울 만한 눈을 더욱 크게 뜨고 헐레벌떡 뒤따라 들어섰다.

“내무반장을 제외한 전원 현재복장으로 연병장에 집합!”
부관은 권총을 치켜든 채 여자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혼비백산한 훈련병들이 밖으로 뛰어나가자 그녀는 내무반장에게 헌병대에 연락하라고 지시했다. 모두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돈인가?”
그녀는 손을 내리긴 했지만 여전히 권총을 빼든 채 물었다. 나는 미국에 온 후 4년 동안 번 돈을 꼬박꼬박 모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미국 천지에 아는 사람이라곤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노라고 말했다.

“그걸 입증할 수 있나?”
“넷! 수표책이 있습니다.”
“그럼 왜 은행에 넣어두지 않았나?”
“몰랐습니다!”

부관과 선임하사는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10분이 채 못되어 요란스럽게 불을 빤짝거리는 헌병 차가 도착했다. 언제 연락을 취했는지 은행직원도 동행해 있었다. 그 은행은 졸지에 거액의 예금고를 올린 셈이다. 사실 미국에서 개인이 일시에 2만 불을 예금하는 경우는 지금도 흔하지 않은 일이라고 알고 있다.

통장을 중대본부 금고에 보관시키고 난 부관은, "자, 이 보관증을 잘 가지고 있다가 훈련 끝날 때 찾아가라. 그러고 보니 당신은 부자네. 더 숨겨놓은 돈은 없겠지, 설마?" 하고 물었다.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정말 그게 다야? 또 있을 것 같은데?"
부관은 역시 여자라 내 표정의 변화를 세밀하게 관찰한 모양인지 다시 한번 추궁했다. 나는 기왕에 이렇게 밝혀진 김에 모두 맡겨두는 게 오히려 마음 편하다는 생각이었다.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녀는, "중사!" 하고 선임하사부터 큰 소리로 불렀다.
 
"이번에는 얼마를 어디에다 감춰뒀다는 게야?"
"돈이 아니라 시계가 있습니다. 8천불 짜립니다."
"8천불 짜리 시계.....?"

부관은 믿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비싼 시계가 어디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선임하사가 빙긋이 웃으며, "롤렉스 쯤 되는 모양이지요. 가봅시다." 하고 내무반 쪽으로 앞서자 부관도 권총을 빼어 들고 뒤를 따랐다.
그래서 그 동안 정복 주머니에 숨겨두고 혹시 누가 알기나 하면 어쩌나 불안해하던 시계도 중대본부 금고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나중에 소문을 들으니 부관은 언젠가 내가 그 가방을 몰래 열어보는 것을 목격한 모양이었다. 관물검사도 그 돈가방을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약이라도 되는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그날의 소동 덕분에 훈련병들은 연병장에서 한참동안 기합 아닌 기합을 받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돈 가방이나 시계 걱정 없이 편히 지낼 수 있었다.

훈련소의 일과는 새벽 5시반에 기상을 해서 구보를 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한바탕 땀을 흘리고 돌아오면 샤워를 한 후 각자 식사를 한 뒤 7시45분까지 집합해서 8시 정각에는 어김없이 훈련이 시작됐다. 그러나 다른 훈련장에 갈 때는 8시까지 해당 훈련장의 조교들에게 병력이 인계돼야 하기 때문에 단체로 식사를 할 경우도 있었다. 한국군과 대부분은 비슷했다. 역시 민주군대라 우리시대의 한국군처럼 구타가 없다는 게 달랐다. 대신 기합은 많았다. 집합 때는 한 명이 늦어도 전원이 모일 때까지 엎드려 뻗쳐를 하기가 일쑤였다.

그날 아침에도 우리중대는 몇 명의 굼뜬 훈련병 때문에 끙끙거리며 기합을 받고 있었다. 중대 인사계는 노병인 내가 기합을 받고 있는 게 안쓰러웠던지 내 엉덩이를 툭툭 차서 일으켜 세웠다.
“마, 넌 먼저 식당에 가서 밥 먹고 있어!”

그가 대충 그런 지시를 했는데 내 귀에는 '식당'이란 말밖엔 들어오질 않았다. 미국사람들도 그런 걸 보면 인정은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혼자서만 먼저 식사를 하자니 다른 훈련병들에게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때마침 구보 끝이라 나는 한창 입맛을 돋구며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헤이 미스터 캉! 너 지금 뭣하고 있는 거냐!”
인사계가 한심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우리중대 배식 시간을 알아 오랬더니, 원, 저 혼자 신나게 먹고 있구먼...”
함흥차사가 된 나를 기다리다 뭔가 잘 못됐음을 눈치 챈 그가 식당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이미 우리중대의 배식 시간은 끝나있었다. 한국군 같았으면 몽둥이께나 맞을 일이었다. 인사계는 어이가 없었는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미국식으로 따지자면 말을 잘 못 알아듣는 내게 시킨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래서 우리중대는 그날 아침을 훈련장에 나가서 씨-레이션으로 아침을 떼웠다.

그래도 나는 전반기 훈련을 무사히 마쳤다. 엄격히 말하면 무사히 마친 건 아니다. 필기시험이 빵점이었던 것이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문제를 읽기나 해야 해답을 쓰고 그래야 맞든지 틀리든지 할 터였다. 덕분에 나는 후반기 병과교육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3개월 과정의 어학코스로 투입되었다. 한데 뜻밖에도 나 같은 군인들이 많았다. 남미계와 동양인이 대부분이고 흑인들도 더러 섞여 있었다. 어릴 때 그렇게도 중학교를 가고 싶어했는데 그때 배웠을 영어를 나이 40이 다되어 본고장인 미국에서 제대로 배우다니 팔자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초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림책을 갖다놓고 담배니 우유니 성냥이니 하는 말들을 배웠다. “C,I,G,A,R,E,T,T,E”하고 스펠링도 외었다. 단어야 어른들이 사용하는 것들이었지만 그림을 보고 하나하나 말을 배우는 것이 초등학교 일 학년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매일 숙제를 내줬기 때문에 그때 배운 알량한 「영어실력」이 후에도 나의 미국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후반기 훈련은 조지아주에 있는 「포트 베닝」이란 데로 가서 받았다. 미주리에서 그레이 하운드 버스를 타고 꼬박 사흘만에 도착했으니 미국이 크긴 큰 나라였다. 그런가 하면 세상이란 게 또 그렇게 좁을 수가 있는 건지! 도착해보니 소대 선임하사가 아는 얼굴이었다. 내가 월남에 있을 때 보급소에서 근무하던 일등병이 9년만에 중사가 돼서 그 훈련소에 와있었던 것이다.

월남에서 나는 민간인이었지만 미군 보급소에서 보급품을 타오는 트럭을 운전해서 헤일 일병과는 일주일에 몇 차례씩 얼굴을 대했었다. 미국사람들은 공사구별이 확실해선지 구면이라고 해서 선임하사가 내게 특별히 봐주는 일은 물론 없었다.

내무반장은 '르네'라는 흑인이었는데 이 녀석이 나를 몹시 괴롭혔다. 그는 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같은 훈련병이지만 막바로 일등병을 달고 있었다.

막사와 변소청소, 그리고 불침번을 돌아가며 분담했는데 그게 문제였다. 우리분대가 아홉 명이니 계산해보면 분명히 일주일에 하루는 내가 빠져야 되는데 매일저녁 보초명단에 내가 들어가 있었다. 내무반장 녀석이 말도 제대로 못하는 동양인인 나를 깔보고 그렇게 짜는 것이었다. 그것도 밤마다 자정 아니면 1시에 집어넣었다.

군대생활을 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겠지만 보초란 초번과 말번이 제일 좋은 것이다. 조금 늦게 자고 조금 일찍 기상하면 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겨우 깊은 잠이 들 무렵인 12시나 1시에 기상해야 하는 것처럼 힘든 게 없는 법이다. 나는 한달 가량 아침마다 지난밤의 보초명단을 뜯어서 모아뒀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점호가 끝난 후 르네에게로 가서 “너 오늘밤에도 날 불침번명단에 집어넣으면 안 설 테니 그렇게 알아둬!”라고 다짐했다.

“야, 불침번 순서는 내무반장인 내가 알아서 짜는 거고 그걸 어기면 넌 명령불복종이야.”
나는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걸 꾹 참고 “좌우지간 오늘밤엔 안 설 테니 알아서 해!”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분을 삭이느라 좀처럼 잠이 안 와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는데 어느 녀석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나는 그대로 잠을 청했다. 얼마간이 지났는지 다시 불침번이 나를 흔들었다. 2층 벙크베드에서 내무반을 내려다보니 한쪽에서 내무반장과 다른 두 녀석이 의자를 가운데로 끌어다 놓고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군화끈을 단단히 묶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야, 너 왜 오늘도 날 보초에 집어넣었어?”

나는 인원이 몇 명이고 매일 몇 명이 보초를 서는데 나는 매일 명단에 들어있느냐고 따졌다. 녀석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나를 쳐다보며 “지휘자는 나야. 영창에 가는 게 더 좋으면 마음대로 해, 이 차이니즈야!”하고는 더 이상 상대를 않겠다는 태도로 나로서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잡담을 옆엣 녀석들과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는 가운데 놓인 의자를 걷어차 엎어버리면서 녀석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멱살 쥔 손을 잡아당기며 멋지게 박치기로 들이받았다. 마흔이 다된 내가 한창때인 흑인녀석과 정상적인 방법으로 맞붙을 상대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세게 받았던지 녀석은 제자리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나는 군화발로 쓰러지는 녀석을 한번 더 걷어찼다. 다 집어치우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뿐이지 하는 심사였다. 세상을 참을성으로 버티어온 나였지만 더 이상 수모를 참을 수가 없었다. 같이 맥주를 마시던 녀석들은 질겁을 하고 도망쳤다. 그 바람에 잠자던 소대원들이 모두 일어나고 르네녀석은 피투성이가 되어 내무반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곧이어 주번사관이 뛰어오고 금세 헌병 차와 앰뷸런스가 나타났다. 나는 헌병대로 연행됐다. 내무반장은 병원으로 실려갔다.

“왜 그랬나?”
헌병이 물었지만 나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한밤중에 중대장과 인사계까지 헌병대로 부랴부랴 달려왔다. 나는 나중에 선임하사에게 얘기를 하겠다고 말했다. 날이 새자 선임하사가 나타났다.
“너희 소대의 그 코리안 친구가 밤중에 소동을 일으켜 헌병대에 연행돼 있는데 당신에게만 이유를 말하겠다고 버틴다”는 전갈을 받았다는 것이다.

“맞다. 너는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랬다.”
나는 그에게 얘기를 좀 하고 싶다고 말했다.

헤일중사는 담당헌병에게 “저 친구는 내가 베트남에 있을 때부터 알던 아인데 아주 착실하다. 나와 얘길 하겠다니 다른 방으로 좀 데려가게 해달라”고 말했다.

아무도 없는 다른 방으로 가자 나는 자초지종을 다 얘기했다. 그 동안 모아둔 불침번 명단도 건네줬다. 말없이 내 얘기를 모두 들은 선임하사는 “하지만 너, 사람을 때리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그것도 르네는 너보다 상급잔데...” 하고 말했다. 측은하게 생각됐는지 말투는 부드러웠다.
“안다. 영창 간다. 제대된다. 그리고 한국가면 그뿐이다.”
나는 각오가 다 되어있다고 말했다. 헤일중사는 나를 앉혀둔 채 전화로 중대장에게 내 얘기를 전했다. 얘기를 듣고 보니 중대장도 내가 측은했던지 아니면 사건화되면 자신에게도 지휘책임이 있어선지 헌병에게 이 문제는 자기에게 맡겨달라고 말한 모양이었다. 얼마간인가 헌병대에 앉아있으려니 헌병이 나를 불러 중사를 따라가라고 말했다.

중대본부에 돌아가 무슨 징계가 떨어지려나 생각하며 앉아서 대기했다. 분위기가 돌아가는 걸로 봐서 한국으로 돌려보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때 머리에 붕대를 칭칭 동여맨 내무반장이 나타났다. 선임하사는 그를 본부 한쪽 구석으로 데려가더니 큰 소리로 꾸짖기 시작했다.
“야, 저 친구는 영어를 잘못할 뿐이지 네가 동네에서 뛰어 놀고 있을 때 벌써 한국군을 나온 베테란이야! 때문에 군대에 대해서는 나보다도 더 잘 안다. 전쟁터까지 다녀왔단 말야! 네가 그에게 한 짓을 넌 알기나 하나? 넌 뭐하는 놈이야, 임마! 어째서 보초명단을 그토록 부당하게 짜나? 또 ‘갓뎀 차이니즈’란 말은 왜 했으며 취침시간에 불을 켜놓고 맥주를 마신 건 뭐야? 영창은 바로 네가 가야돼! 알겠나?”

내무반장은 아무말도 못하고 피가 배어나온 붕대를 감은 머리통을 숙였다. 온통 검은 머리통에 흰 붕대를 감은 모습이 유별나게 눈에 띄었다.

“영창 가기 싫으면 지금 강 이병에게 가서 사과해!”
중대장이 거들자 그는 대뜸 내게로 와서 손을 내밀며 사과했다. 나도 그 땐 이미 분이 풀렸으므로 “나도 널 때려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한밤중의 소동은 일단락이 됐고 그후로는 아무도 나를 넘보지 않았다.

그런 저런 곡절을 겪으면서 하루하루의 생활에 익숙해져 가는 동안에 계절은 바뀌어 훈련소 주변의 울창한 나무들이 온갖 색깔의 단풍으로 흐드러져 있었다. 미국 군대라는 게 역시 한국군과는 다른 데가 있었다. 말하자면 제 나라를 지키는 국방이라기 보다는 훈련의 내용이란 게 주로 해외생활에 관한 것이 많았다.

“미군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파견될 수 있기 때문에 주둔지의 음식을 뭐든 먹어야 할 때가 있다. 굶기 싫으면 말이다. 이를테면 한국에선 개도 먹는다.”
조교는 각국의 특이한 음식을 예로 들면서 보신탕을 들먹였다. 훈련병들이 와르르 웃으며 시선을 내게로 모았다.

“여기 코리언이 있습니다!”
어느 짓궂은 녀석이 나를 가리켰다. 설마 그럴 리가 있느냐, 한번 확인해봐라, 그런 말투였다. 나는 한국에는 식용으로 쓰는 개가 따로 있다고 둘러댔다.

“아무튼 그들은 개도 먹는다.”
조교는 다소 자신을 잃은 표정이었지만 그렇게 버텼다. 그밖에도 세계각국의 풍습을 소개했지만 나는 내무교육시간이면 으레 한국으로 보낼 편지를 쓰는데 열중했다. 아무도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영어를 모르니까 한글로 강의내용을 열심히 메모하고 있으려니 하고 짐작하니까 거칠 것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전후반기 두어 달과 어학교육 석달, 총 5개월의 훈련기간을 마쳤다. 그게 77년 12월말이었으니 그해 여름에 입대해서 한겨울에야 수료한 것이었다. 어느덧 울긋불긋하던 주위 풍경은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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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11/28 [16:29]  최종편집: ⓒ honaminworl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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