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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입국 4년만에 미군되어 동두천에 오다
 
코리안보이스 기사입력  2010/11/28 [16:30]
나는 국민학교 졸업이후 처음으로 세 장의 수료증을 손에 쥐고 훈련소를 나섰다. 4년만에 의젓한 모습으로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설레었다. 그것도 미합중국 정부가 여비까지 대주는 게 아닌가. 미군은 전출시에 대개 개인 출발로 배속지에 가게 되어 있었다. 나는 희망한대로 용산에 있는 8군 보충대로 도착하라는 명령지를 들고 있었다. 말미는 10일이었다.
나는 빚쟁이처럼 도망쳐 나왔던 뉴욕을 거쳐 노스웨스트 항공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공항 대합실에 앉아 있으려니 만감이 교차했다.

가짜 취업증을 들고 미국 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바로 그 비행장에 어엿한 이 나라 군복을 입고 돌아오다니! 나는 어떤 위기를 맞아도 좌절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는 힘과 여유를 허락한 하나님께 감사했다.

“한국으로 전출 가십니까?”
대합실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노라니 40대쯤의 한국인남자가 다가왔다. 5백불을 내면 좋은 곳에 배치받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용산 근무를 시켜주겠다는 것이다.
“일 없어요. 어딜 떨어지든지 복불복이지 뭐.”

나는 전차병과를 받았으니 2사단으로 갈 것이 틀림없었다. 동두천이 고향이니까 내게 '좋은 곳'이란 바로 거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가보시면 후회하실 겁니다.”

미국 땅에까지 이런 사람들의 발길이 뻗어 있다니. 우리 한국인들은 확실히 유별난 데가 있었다.
비행기에선 줄곧 잠을 잤다. 요즈음 같으면 미국비행길 타도 한인 승객이 태반인데 옆자리에서부터 그 옆자리까지 온통 외국인들 뿐이라 잠자는 일밖에 할 일이 없었다. 스튜어데스가 먹을 것을 갖다주면 그걸 먹고 나선 잠이 들고 다시 마실걸 갖다주면 그걸 마시곤 눈을 감고....그러다가 비행기 안을 다 돌아보아도 한국사람은 3명 정도 뿐인 것 같았다.

그렇게 자고 깨기를 되풀이하다 보니 이윽고 저만치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온통 크고 작은 산들로 뒤덮인 고국이었다. 사방에 산이라곤 볼 수 없는 광활한 땅, 미국의 풍광에 익숙해진 탓인지 내 눈에는 국토가 온통 산비탈뿐인 것처럼 보였다.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미국 군인이라고 일반승객들과는 다른 문으로 세관검사도 없이 나가게 되어 있었다.

미군은 전출증이니 뭐니 하는 것도 필요 없고 단지 군인 신분증 한 장이면 여권도 없이 미국에서 한국까지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민간인으로 월남도 가보고 더구나 처음 미국에 밀입국할 때는 종이 한 장에까지도 운을 맡겨보고 했지만 미군이라는 신분증 한 장이 이렇게 입장을 바꿔주다니! 입국 서류도 아주 간단한 것을 써넣으면 끝이고 짐은 아예 통관검사도 않으니 격세지감이란 말은 바로 이럴 때를 두고 쓰는 말일 것이다.

나는 마음 한구석에 철없이 우쭐대는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남의 나라 힘에 기대고 사는 나라는 이렇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 기분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대기하고 있는 8군 버스로 곧장 올라타지 않고 미적댔다. 사실은 뉴욕에 있는 동안 이것저것 돈이 될만한 물건들을 가방이 불룩하게 사 넣고 왔기 때문이었다. 버스를 탔다가는 혹시 헌병들이 짐 수색을 할까 겁이 났던 것이다.

한국군처럼 인원파악을 하는 일도 없이 버스는 후딱 떠나버렸다. 나는 밖으로 걸어나와 택시를 집어탔다. 나쁜 짓을 한다는 죄책감도 있었지만 상계동 달동네에서 궁색하게 살고있을 가족생각을 하면 어쩔 수가 없었다.

지나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은 사실이지만 부정한 방법으로 번 돈은 수중에 오래 남아있는 법이 없다. 이제는 기억해내기도 싫은 일이지만 내가 그렇게 마련한 돈은 결국 써보지도 못하고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흘러내려 없어져버렸다. 내 집안의 어느 누가 어떻게 해서 그걸 탕진했다고 여기서 밝히고 싶진 않다.

지금은 귀국할 때마다 서울의 모습이 알아보기도 어렵게 발전하는데 놀라곤 하지만 그 때는 4년 전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택시에서 내다보이는 도로며 거리풍광이 모두 조막조막해 보이고 공기까지도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상계동에 이르자 길이 좁아지면서 택시가 더 들어갈 수 없는 달동네 입구에 다다랐다. 나는 차에서 내려 더플백을 둘러메고 비탈길을 헉헉거리며 올랐다. 도망가듯 이곳을 떠나 미국이라는 신천지에서 새로운 삶을 설계하다가 좌절하고 다시 미국군대라는 피난처로 숨어들어 여기까지 온 것은 모두 한낱 꿈이었고 이제 현실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기분 좋은 꿈속에서 깨어난 것처럼 입맛이 찜찜했다. 

"어, 이게 누구야! 혹시 강씨..., 아뇨?"

군복을 입은 내 모습을 용케도 알아본 것은 주씨였다.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 자가용으로 택시 영업을 할 때 알고 지내던 운전사로 말하자면 동료였다. 그날이 쉬는 날이었던지 운동복을 걸치고 담배라도 사러 나왔는지 허름한 모습이었다. 엉뚱하게 미군복을 입은 내 모습과 여전히 궁핍한 냄새가 배어 있는 그의 모습을 대비하며 순간 서글픈 연민의 정이 스쳐갔다. 또 상계 약국의 '뚱뚱이' 주인도 깜짝 놀라 뛰어나오고 만나는 동네 사람들의 반응도 가지가지였다. 대부분 가난에 찌들고 폭폭한 심정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이렇게 거짓말처럼 변신한 모습으로 돌아온 나를 부러워하는 눈치들이었고 한편으로는 내가 미군이 되었다는 소문이야 손바닥만한 동네에 하루아침에 퍼져 있었을 테니까 다들 알고는 있었겠지만 막상 미군복장을 하고 나타난 내 모습을 진짜로 보는 것은 또 다른 미묘한 감정을 갖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수십 가구가 같이 쓰는 공동변소앞을 지나려니 향기롭지 못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솔직히 이것이 원래 내가 속해있는 사회라는 걸 바락바락 부인하고 싶었다. 아이들을 만날 때까지는 그런 기분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반갑고 신기한 눈으로 미군이 되어 돌아온 나를 쳐다보며 저녁 때가 되도록 내 주위에서 맴돌았다.

4년만에 돌아온 집에서 하루 밤도 못 자고 나는 집을 나섰다.
용산에 도착하니 보충대 부임 시간인 자정까지는 두어 시간이 남아있었으므로 미8군 후문 근처의 다방으로 들어갔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만난 사람이 “생각이 달라지면 찾아가보라”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모자를 벗고 앉아있으려니 중년남자가 다가와 은밀한 투로 말을 붙였다.
“보충대로 들어가시는군요? 용산에 남고싶지 않으십니까?”

그 사이에 값은 8백불로 올라 있었다. 막상 와서보니 서울에 남고싶은 생각이 없지도 않았지만 애당초 각오가 되어있던 터라 그쯤에서 나는 대화를 끝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예상대로 2사단으로 배속 받아 동두천으로 떠났다. 캠프 케이시에 있는 2사단 보충대에 도착하니를 거기서도 잘못하면 판문점이나 비무장지대 경계 부대, 혹은 전곡 북쪽 최전방의 산꼭대기에 있는 미사일부대 초소로 갈 수도 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차에서 내린 후 더플백을 들고 대오 속에 서 있으면서 부대 안에 오가는 한국인들을 살피고 있자니 오가는 민간인들 가운데는 낯익은 얼굴들도 제법 보였다. 그 중에는 박무한이란 초등학교 친구도 있어서 나는 반가운 마음에 "무한아!" 하고 불렀다. 그는 설마 줄을 서 있는 미군들 가운데 내가 서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하고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며 반가워했다. 나는 간단히 내가 미군에 입대한 경위를 설명하고 전방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가 있는데 어떻게 여기 본부 안에 근무하는 길이 없겠느냐고 의논을 했다. 그는 자기가 바로 보충대 중대장의 하우스 보이를 하고 있다며 한번 알아보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그 친구가 도와 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캠프 케이시 안에 있는 72전차부대로 배속을 받았다. 미군이지만 한국에 있는 한 아무래도 한국적인 풍토에 물이 들게 마련이니까.  
 
 
내가 도착했을 때는 하필 '팀 스피리트78' 기동 훈련 중이어서 나는 부대를 따라 전곡, 연천, 신망리 등 전방 지역으로 탱크를 타고 새삼스레 노병생활을 시작했다. 낯익은 산하를 누비려니 어릴 때 탄피를 줏으러 다니던 기억이 새로웠다.

훈련이 끝나자 한국군과 마찬가지로 'I.G. 인스펙션'이라고 하는 장비검사가 뒤따랐다. 지독하게도 추운 날씨에 쇳덩에 달라붙어 닦아내고 기름을 칠하자니 때늦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기름걸레를 수령하러 중대본부엘 갔더니 벌겋게 타오르는 난로 곁을 떠나기가 싫었다. 중대본부에는 사병 두 명이 서툰 솜씨로 액자를 만들고 있었다. 각종 수칙이니 직속 상관 사진 같은 것들을 끼워서 걸어놓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직업이 직업인지라, 이봐, 그건 이렇게 하면 쉽잖아, 어쩌고 하면서 보다못해 간섭을 했던 모양이다.

“어이, 너 그런 것 좀 만질 줄 아는 모양이구나. 입대 전 직업이 뭐였나?”
언제 들어왔는지 인사계가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지 나를 붙잡고 이것저것 물었다. 다 듣고 난 인사계는 그 때까지 일하고 있던 두 명중 하나를 가리키며 “네가 가서 저 친구 탱크를 닦아라”하고 내보내는 것이었다. 나는 내친 김이라 나머지 한 명도 필요 없다고 말하고 나무를 집어들었다. 졸지에 두 녀석과 나는 처지가 뒤바뀌어 버렸다.
그까짓 네모반듯한 액자 만들기 쯤이야 식은 죽먹기보다 쉬운 일이라 하루만에 나는 수십 개를 거뜬히 해치웠다. 그걸 본 인사계는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흔들었다. 미국사람들이 기가 막힌다는 뜻을 나타낼 때 하는 몸짓이었다.

“믿을 수가 없구먼...네가 혼자서 이걸 다 만들었단 말이지?”
그는 다음날도 나를 붙들고 다니면서 종일토록 중대막사 주변의 검열준비를 이것저것 시켰다.
내가 부임한지 한 달쯤 된 날이었다. 인사계가 부르더니 중대장의 차를 운전하라는 것이었다. 마침 운전병이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게 되자 나를 추천한 모양이었다. 인사계로서는 나머지 시간에 나를 부려먹을 심사였을 것이다.

탱크 병에서 일약 중대장 운전병으로 발탁된 지 두어 달쯤 되는 때였다. 미8군 참모회의에 참석한 주블러 대위를 태우고 서울에서 부대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미군은 이따금 도로를 막아놓고 차량검사를 하는 일이 있다. 그 때도 의정부를 막 지난 지점에서 검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중대장과 나를 차에서 내리게 하더니 검사관이 직접 차에 올라 한 바퀴 몰아본 후 보네트를 열어 젖히고 이것저것 점검을 했다. 거기서 한 가지라도 불합격하면 내가 처벌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차 주인인 중대장도 경고 레터를 받게되어 있었다.
검사를 끝낸 병기단 준위가 주블러 대위에게 오더니 나를 가리키며 “저 병사가 이 차를 운전한지 얼마나 됐습니까?”하고 물었다. 중대장은 내게 “얼마나 됐나?”하고 묻고는 “뭐가 잘못 되었소?” 하고 병기관을 바라보았다.

병기관은 “잘못되었냐구요? 천만에요. 다음 달이면 제 병기단 근무가 만12년이 됩니다만, 이런 차는 처음 봅니다. 아주 새 차 같지 않습니까.”
그도 그럴 것이, 겉은 물론이거니와 엔진부위까지 정비는 말할 것도 없고 먼지 한 톨 없을 만큼 청결하게 수입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차를 그토록 유지할 수 있었던데는 또 그만한 까닭이 있다.

동두천이 바로 고향인 나로서는 부대내의 세차장이나 정비공장, 어디를 가든지 어릴 때 알던 얼굴들이 숱했다. 탱크부대는 연료가 흔하기 때문에 나는 주유소에 붙어있는 세차장엘 갈 때마다 지프차의 스패어 연료 통에까지 기름을 잔뜩 채워갔다. 부정한 짓이긴 하지만 물자가 넉넉한 미국 물건을 가난한 고향사람 좀 나눠준들 그리 큰 죄는 아니지. 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더구나 내 손으로 그 댓가를 엽전 한 닢 받은 적이 없다. 나는 “여보게 석남이, 사무실 돌아갈 만큼만 남겨놓고 죄다 빼도 돼.” 라면서 소위 '기마이'를 썼다. 그러니 그들이 내 차를 얼마나 윤기 나게 닦아놓았겠나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아침에 주블러 대위를 출근시키고 나면 퇴근시간까지는 대개 별 일이 없으므로 선임하사나 부관이 시키는 일이 없으면 그들에게 “필요하면 세차장으로 전화하십시오”하고 연료고를 거쳐 세차장으로 가곤 했던 것이다.

그걸 내가 직접 닦는 줄 아는 부관은 티 하나 없이 광택이 반짝거리는 자동차를 보며 “넌 이게 네 방인 줄 알지?”하며 놀리곤 했다.
어쨌든 내차는 각종 검사 때마다 시범차량으로 뽑혔고 그 때문에 결국 중대장의 상신으로 일계급 특진까지 되었다. 당시 봉급이 5백불 정도 되었는데 진급으로 봉급도 월50불을 더 받게 되었다.

특진 얘기가 나왔으니 또 다른 특진 얘기까지 해야겠다.
79년 4월말쯤으로 기억된다. 팀 스피리트 훈련이 막 끝날 때였다. 요즈막의 세상은 우리 같은 사람이 따라잡을 수도 없는 속도로 변해서 남북관계도 그 때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이 달라진 덕분에 이 한미 합동 기동 훈련도 없어진 모양이다.
나로서는 고향인 철원이 휴전선으로 동강났으니 미군이 되어 고향근처를 돌아다니며 전쟁 연습을 하는 감회가 남달랐다.

어머니 손을 잡고 부모님의 고향인 동두천과 철원 사이를 수도 없이 오갔으니까 훈련 지역은 바로 내 어릴 때의 체취가 구석구석 배어 있는 곳이었다. 다만 그 때는 어렵사리 오갈 수는 있었전 곳이 지금은 휴전선으로 막혀 양쪽이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는 것이 차이일 뿐이다.
어쨌든 그 한미합동훈련에 참가했던 우리 '강철기갑부대'가 신망리 근처에서 철수하고 있었다. 나는 인디언 마크와 '천하제일'(SECOND TO NONE)이란 부대 구호가 휘날리는 주블러 대위 차를 운전하고 있었는데 뒤돌아보니 탱크 한 대가 따라오지 않는 것이었다.

“저 탱크가 안 따라오는데요?”
나는 중대장에게 질문 겸해서 보고했다.
“음, 그놈 고장이 났다는 구만.”
“어디가 고장이 났습니까?”

나는 주제넘게 꼬치꼬치 물었다. 물론 나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였다. 웬만하면 “넌 알 것 없어!” 하고 귀찮아할 상황이었지만 주블러 대위는 내가 밉보인 일이 없으니 “응, 토신 바가 부러졌다는 구만.” 하고 고분고분 알려줬다.
“갈아 끼우면 되잖습니까?”

나는 내친걸음이라 또 물었다. 사실은 여차하면 내가 갈아 끼우려는 생각이었다.
“이 사람아, 부품이 있어야 갈아 끼우지.”

하와이에서 그게 도착하려면 빨라도 한 주일은 걸릴 텐데 그 때문에 보초설 병사들이 꽤 여러 명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사단장이 아침저녁으로 헬기를 타고 남겨둔 탱크가 안전하게 있는지를 확인한다는 것이었다.
일과 후에 나는 동두천 시내로 나갔다. 군용품을 취급하는 블랙마켓을 뒤져보기 위해서였다. 없는 게 없다는 암시장이었다.
하지만 부러진 전차 부품인 둥근 쇠 지레 같은 것을 들고 이곳저곳을 뒤지는 나를 수상하게 여긴 한국군 범죄수사대 요원이 나를 미행하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탱크 언더캐리지를 잡아주는 철 막대긴데 이런 것 없습니까?”

수사요원이 내 허리춤을 잡아챈 것은 네 번째 가게인가를 뒤적일 때였다. 사복을 하고 있었으니 의심을 받는 건 당연했다. 두 명의 CID요원에게 끌려간 나는 신분증을 내보이고 사정을 설명했다. 그들은 “제길...여보슈, 우리가 거길 언제부터 따라다닌 줄이나 아슈? 한 건 올리는 줄 알았잖아.” 하며 “우리가 그걸 구해줄 테니 맥주나 한 박스 사오실 테요?” 하고 나를 놓아줬다.
나는 저녁때가 되어 맥주를 사들고 남산머루에 있는 육군 방첩대 파견대로 다시 찾아갔다.
“어, 이 양반 진짜 왔네.”

그중 준위 계급장을 단 친구가 “공짜로 맥줄 얻어먹을 수도 없잖아, 제길헐.” 하고 혀를 차면서 어딘 가로 전화를 했다.

그는 “오늘은 너무 늦었고 내일 양주나 한 병 들고 여길 찾아가보슈.” 하며 한국군부대를 소개시켜주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한국군에도 월남전 덕분에 미군 장비와 같은 모델의 철수장비가 꽤 있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주블러 대위에게 내가 문제의 토신 바를 구해 올 테니 차량 운행증을 끊어달라고 말했다. 부대에서 50마일 반경을 벗어나려면 사단사령부의 승인을 받게 되어 있었다. 중대장은 자기 차는 지휘 차량이라 규정상 곤란하니 부관차를 타고 가라고 허락했다. 피엑스에서 조니 워커 두 병을 사들고 나는 부대를 나섰다. 실로 오랜만에 한가한 전방의 지방도로를 신나게 달렸다.
 
경찰은 물론 헌병도 미군 지프차를 잡고 시비를 거는 법이 없었다. 서울에서 지척인데도 왕복 2차선인 길은 꼬불꼬불했다. 한창 파릇파릇하게 물이 오르고 있는 주위의 초목들이 싱그럽게 보였다. 부대는 90킬로미터 정도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먼지가 풀석이는 비포장도로를 꺽어들어가 위장막을 짊어진 위병소를 지나 산등성이를 오르니 땅바닥이 기름에 절은 병기중대 막사가 숨어있었다. 병기관인듯 싶은 준위가 별로 반갑지는 않은 표정으로 미리 준비해둔 막대모양의 부품을 내줬다.

“미국서 신품 오면 반납하시오, 잊지 말고.”
준위는 술병과 부러진 토신 바를 받아 넣으며 당부했다.

부대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장교클럽에 들어서니 중대장이 얼마나 반가웠던지 벌떡 일어나서 나를 맞았다. 그러잖아도 장교들과 함께 내 얘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어디 가서 자동차 뺏기고 매라도 맞고 있나 걱정했잖아! 얼마나 멀리 갔었나?”
나를 보내놓고 몹시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그는 같이 있던 수송관에게 다음날 날이 밝는 대로 탱크를 몰고오라고 지시했다.

다음날 피엑스에서 콜라를 시켜놓고 쉬고 있으려니 중대장이 급히 찾는다는 전화가 왔다. 허겁지겁 중대장실로 뛰어갔더니 주블러 대위는 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가 “자네, 나하고 갈 데가 있어” 하면서 사단사령부로 가자는 것이었다.
“아침에 탱크가 없어졌다고 난리가 났었어. 사단장께서 헬기를 타고 순찰을 갔었다지 뭔가. 미처 보고를 못 드렸었거든.”

중대장은 지금 생각해도 아침의 소동이 재미있다는 듯 껄껄 웃으며 특유의 손짓, 몸짓을 섞어가며 말했다. 그는 기분이 좋아서 나를 마치 친구처럼 대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자넬 데려 와보라는 거잖아.”
나는 그래서 또 한번 특진을 했다. 불과 일년만에 2계급이 뛴 것은 아마 미군사상 흔치않은 일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전쟁중이 아닌 평시에 말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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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11/28 [16:30]  최종편집: ⓒ honaminworl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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