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장 운전병을 하다보면 운전할 일이 없을 때는 다른 잡일을 시킬 때도 있었다. 주블러 대위가 2주일간 휴가를 갔을 때도 그런 경우였다. 인사계가 나를 부르더니 중장비를 실어 나르는 트레일러인 '로우 보이' 있는 데로 데려갔다. 그 위에는 구형 탱크가 한 대 실려 있었다.
"캉, 너 이거 운전할 수 있나?" "물론입니다." '로우 보이'는 내가 월남에 있을 때 한동안 운전을 했던 것이니까 문제가 없었다. 인사계는 "내, 그럴 줄 알았다. 네가 못하는 게 있을라구. 그럼 저걸 여기로 좀 끌고 가라." 하며 지도를 한 장 내밀었다. 전곡 북쪽 신망리 일대의 지도였다. "거기 가면 한국군 포병이 신호를 해줄 테니까 그 사람들 원하는 대로 해주면 된다." 나는 탱크를 실은 '로우 보이'를 몰고 북쪽으로 달렸다. 휴전선이 가까워지면서 산이 점점 깊어갔지만 어릴 때도 드나들었고 커서도 친구들과 놀러 다녔던 곳이니까 지형에 대해서는 훤히 기억하고 있는 곳이었다.
한 시간이 넘었을까, 연천과 신망리를 지나자 한국군이 깃발을 들고 안내를 해주었다. 모퉁이마다 사병들이 서서 빨간색 깃발로 신호해주는 대로 산길을 꼬불거리며 중턱쯤 올라가니 장교 두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는 지휘관인 듯 하고 다른 한 명은 통역장교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미국인이 올 줄 알았다가 내가 나타나자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들은 조금 더 올라가면 다른 장교가 다시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가 가리키는 지점에 탱크를 부려놓으면 된다는 얘기였다. 거기서부터는 경사가 심했기 때문에 아주 천천히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몇 구비를 더 돌아 올라가니 포병장교가 기다리고 있다가 미군 차가 오는 것을 보고 다가오더니 내가 한국말로 인사를 하자 그도 아주 반가워했다.
"미국 분이 오실 줄 알았는데 한국 분이군요. 반갑습니다. 이 근처 아무 데나 평평한 지점을 적당히 택해서 탱크를 버리고 돌아가시면 됩니다." 나는 아주 느린 속도로 산길을 조금 더 올라갔다. 그런데 백미러를 보니 민간인이 삼십여명이나 헐떡거리며 따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손에는 망치니 삽이니 하는 별의별 연장을 들고 있는 것이 무슨 반란이라도 일으키는 행렬 같이 보여 마음이 찜찜했지만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니까, 하는 생각으로 앞만 보고 운전을 했다. 이윽고 길 옆에 조금 편편한 지형이 보여 거기다 차를 세우고 나는 차에서 내려 탱크를 묶은 래싱을 풀었다. 그러자니 어느 새 거기까지 따라온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나를 에워싸는 것이었다. 나는 일손을 멈추고 의아한 표정으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불안한 생각이 잠시 스쳐갔지만 그 중에도 낯이 익은 얼굴들이 섞여 있는 게 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인지 마음은 담담했다. "야, 근재 아냐, 너?"
헤어진지 20여년이 되는 친구였는데 그는 군복을 입은 내 모습을 얼른 알아보지 못한 모양인지 어물거리더니, "혹시, 신목이....?" 하고 다가왔다. "그래, 나야. 근데 너, 여기서 뭘 하는 거냐?"
나는 반갑기도 하고 마음이 놓이기도 하면서 그에게 영문을 물었다. 그는 탱크를 부려놓으면 한국군 포병들이 그걸 과녁으로 포격 훈련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기들은 탱크를 내려놓은 미군이 그 지역을 벗어나는 동안은 포사격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사이에 탱크에 기어올라 돈이 될만한 것들을 뜯어내기 위해 따라온 것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탱크 안 조종실 바닥에는 알루미늄재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것들은 제법 돈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들 속에 친구 한 명이 더 있어서 나는 탱크 속에 있는 주요 부품들을 뜯어서 두 친구에게 나눠주고 함께 차에 태워서 내려와 개울가에서 라면을 안주로 소주를 나눠 마시고 헤어졌다.
그 후에도 몇 차례 더 고물 탱크를 갖다 버리러 갔는데 그 때는 아예 부대 안에서 값나가는 것은 뜯어서 차에다 따로 싣고 가서 친구들에게 주곤 했다. 나로서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들은 몹시 고마워했다. 그렇잖으면 내가 떠난 뒤 더 좋은 것을 뜯어내려고 머리가 터져라고 경쟁을 해야할 터이니까 다른 사람들도 부러워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앞에서 잠깐 등장했던 언급된 세차장 주인 고석남은 동두천 초등학교 31회로 같은 동기동창이지만 나와는 특별한 인연을 가진 친구였다.
그때 우리 동기생은 120명쯤 졸업을 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중 석남이와 나만 중학교 진학을 못했다. 나는 졸업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목수 일을 배우러 서울로 올라갔고 고아원에 있던 석남이는 거기서 뛰쳐나와서 그야말로 거지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후 용하게도 어려움을 이겨내고 세차장을 꾸리게 되었던 모양인지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다같이 지독히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 같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때로 부당한 대우를 함께 겪기도 했기 때문에 그를 만나자 울적한 기분도 살아나고 마음 깊은 데서 솟아나는 연대감 같은 것도 있어서 나는 각별히 그에게 마음이 씌었고 그래서 내가 베풀어줄 수 있는 것이면 망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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