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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한인사회 어제 오늘
‘뉴욕한국인애국단체’회장 김헌식의 애국활동
<기획연재> 뜻으로 본 미주한인 이민125년사
기사입력: 2009/05/02 [23:15]   honaminworl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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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모
도망유학생의 하나인 김헌식에 관해 좀 더 언급할 필요가 있다. 김헌식은 1899년까지 하워드대에 재학했을 뿐아니라  1907년 10월 4일자의 ‘공립신문’ (10/4/1907일자)에 게재된 “뉴욕한인공제회”라는 단체의 글에 그의 이름이 나온다. 서기 황용성 (‘황휴’라고도 불리던 그는 후년 창녀 알선업으로 미 당국에 체포), 서필순, 안정수, 이원익, 신성구, 김승제, 조두환, 안규선 (익년에 정신이상으로 정신q 병원에 입원), 양흥빈, 홍종진, 송현길, 윤석규 등  뉴욕시에 사는 한인공제회 회원들이 연명하여 ‘공립신문’과 ‘대동공보’에 그들의 뜻을  모아 보냈다.

 

그 요지는 당시 뉴욕일본영사관에서 김헌식을 찾아가 “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 한다”며 한인 명단의   제출을 요구하였기에 각지의 동포들은 이런 종류의 일본의 간계를 경계하라는 내용이었다. (방선주,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한림대 아시아문화 연구소’ 한림대출판부, 1989,  p.309). 1910년 한일합방 후 김헌식이 뉴욕에서 제본업을 경영하던 것으로  알려진 뒤부터 그의 영문명 Seek Hun Kimm은 ‘뉴욕타임즈’ ‘신한민보’ 등에서 이따금 언급되었다.

 

   1910년의 한 ‘뉴욕타임즈’ (8/25/1910일자) 기자는 김한식을 소개하며, 그는 현재 뉴욕 브루클린의 ‘헤이스팅스호텔에 묵고 있으며 ‘뉴욕 한국인애국단체’ Korean Patriotic Association of New York의 회장이요,  전 미국주재한국공사관의 수행원이라 했다.  그는 뉴욕타임즈 기자와의 회견에서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한국독립군이 도처에서 봉기하고 있으며 미국 동포가 조직한 군사학교를 거친 의용군 300여명이 귀국하여 독립전쟁에 참가할 것이라 호언하기도 했다.

 

    그의 가문의 가족이 주미공사 조양희의 집안과 혼인관계의 연을 가진 것은 알려졌으나 그가 한국공사관의 수행원도 아니요 300여명의 군사학교 출신의 한국에 파병할 의용군 등도 없었기에 그의 소원이 과장된 표현으로 나타난 것 같다. 소년병학교의 훈련생이 졸업하고 조국으로 돌아가는 경우를 이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그는 기우는 한말의 홍보에 열심이었고, 중요한 한국문제가  있을 때마다 뉴욕타임즈는 김헌식을 찾았다.  동년 10월에도 ‘신한민보’는 (10/5/1910일자) 김헌식이 구한국공관을 매각하는 일본 대사에게 항의하는 전보를 쳤다고 보도했다.

 

   1912년 일제가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데라우찌 총독 암살을 음모했다는 구실로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애국적인 지도자들 600여명이나 체포하여 그들 중 기독교의 지도적인 105명을 기소하여 투옥했다 이를 계기로 뉴욕에선 김헌식이 주미일본대사와 여러 차례에 걸쳐 뉴욕타임즈를 통해 그 진위에 관한 논쟁을 하면서 상당히 선공적인 반일운동을 펼쳤다. 6월6일자는 미 장로교 해외선교 부에선 ‘105인사건’이 고문에 의한 조작이요 “한국인들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고 증언하며, 조선 총독이 그런 야만적인 방법을 쓴 데 반발한다”는 성명을 전했다.

 

     6월8일 주미일본대사는 이를 부인하자, 7월 24일 뉴욕한국인애국회에선 ‘105인사건’의 목적이 기독교의 박멸에 있고 “혹독한 고문을 일본은 계속한다”고  선언했다. 7월25일 일본대사는 또 다시 고문을 부인하는 기사를 냈으나 7월29일 김헌식은 이를 반박하며 고문으로 2명이 사망한 사실을 폭로하고, 8월5일에는 블라지보스톡의 한인신문을 인용하며 일인의 만행을 생생하게 성토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도 끈질기게 부정하며 11월17일에는 조선총독부 최고재판소장 ‘와다나베’가 직접 뉴욕에 나타나 미국 교계와 언론인들 앞에서 자신도 크리스천이라며 고문은 없었으니 자신을 믿어달라고 호소했다. 이상의 기사들은 당시의  김헌식의 반일 애국적인 활동이 얼마나 컸던가를 잘 보여준다.

 

    105인사건과 관련하여 빠뜨릴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뉴욕에서 발생했다. ‘박승렬 납치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한인들을 납치하여 뉴욕지역에서도 한국에서와 같이 비슷한 음모를 획책하려는 일본의 간교한 사건이다. 한국문제로 고심하다 정신 이상을 일으켜 뉴욕 롱아일랜드의 아이슬립 Central Islip의 정신병원에 벌써 여러 해 입원하고 있던 박승렬이 일본 외교기관에 의해 납치 당하게 되자, 미국에서도 한국에서와 같은  음모사건 을 획책할 위험을 염려하여 김헌식은 ‘뉴욕한국인 애국회’의 이름으로 국무부에 조사선처를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며 신문 기자들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다음은 1912년 8월 12일자 워싱턴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김한식의 영문 호소문의 요지다:

 

   박승렬은 잘 알려진 정치가요 독실한 기독자로서 과거 공화당의 정당을 조직하려다 모국 정부의 체포대상이 되었었고, 일본의 한국침략문제에 고심하다 마침내 정신이상으로 뉴욕 롱아일랜드의 정신병원에 입원중, 불법적으로 납치되어 해외로 압송됐습니다. 지난 6월 한인회는 필라델피아의 루이스 오가다 교수에게서 박씨를 병원에서 나오도록 협조하라는 서신을 받았기에,  한인 일에 관여 말라는 회신을 보낸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박씨에게서  7/17일과 7/23일자 주영일본대사관 주소의 두 통의 서신을 받았습니다. 이에 뉴욕주강제추방국에 문의하여 그가 세 일인에 의해 7/6일 화이트스타 White Star 회사의 올림픽호로 영국에 호송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우리 판단으로는 정신이상 상태의 그를 이용하여 한국에서와 같은 정치적 음모를 미국에서 획책하려는 간계로 우려됩니다. 수년 전에도 손일선이라는 분이 런던의 청국공관에 감금된 사건이 있었으나 영국정부가 이런 유괴를 영국법을 어기는 것이라 항의하여 석방시킨 일이 있습니다.  귀하의 선처를 바랍니다. 김헌식 드림. 그러나  김헌식이 미국시민이 아니요 이미 미국을 떠났기 때문에 국무부는 어찌할 수 없다는 회답이었다.

 

     여하튼 김헌식은 재미한인의 권익과 반일애국적 활동에 열심이었으며, 더욱이 그가 중국어에 능하며 중국동맹회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재미한인의 권익이나 반일애국활동에 재미중국인들과 유대를 강화하며 함께 운동을 폈다. 그는 재미중국인들이 발행하는 신문들을 구독했을 뿐아니라 ‘삼한유민’ ‘청민’ ‘창해객’ ‘세계보’등의 중국신문에 자주 투고 하며 한중 양국의 이해와 협조를 다졌다. 그가 ‘세계보’에 ‘충고동아민서’라는 제하에 게재한 중국어 로 된 장문의 글은 당시의 그의 생각을 엿보게 한다.

 

     이 글에서 그는  한중일의 세 민족이 분열하며 싸우기 보다는 “삼민이 연합하여 세계평화에 기여하며 열국의 아주 지배를 막자”라고  주장했다. 그는 중국어로 된 귀한 글과 자료들을 번역하며 재미 중국인과 한인들에게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이런 중국인들과의 긴밀한 유대 활동 중에 김헌식은 1905년 청조를 전복할 목적으로 조직된 손문孫文의 ‘중국혁명동맹회’와 연결하게 되고 그 미국지부의 지도적 인사들 특히 그 지회장인 조공벽과는 뉴욕에서 오랜 교분을 나누었다. 피차 망국의 서러움을 안은 이들 조공벽과 김헌식은 두터운 우의를 나누었을 뿐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조공벽이 나중에 귀국하여 우리 임정인사들께 상당한 도움을 준 사실이다.(방선주,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pp.313-                                                                                   

 

   1910년대와 1919년의 3.1운동 전후기까지도 뉴욕지역에서 김헌식의 반일애국적 활동은 아주 활발하고 재미동포사회에서 만이 아니라 미국 정계나 언론에서도 꽤 주목을 끌었다. 당시의 신한민보 등에 따르면 뉴욕에서의 김헌식은 유학 중이던 이강공의 수행원이었던 공관원 신성구와 더불어 이 지역의 대표적인 인사였던 것같다.

 

    1914년 3월 12일자의 신한민보에 보도된 김헌식의 보증으로 이경재 가족이 출국을 모면한 사실은 이런 김헌식의 입지를 잘 보여준다. 1914년 3월 홍콩에 물건을 구하러 가족과 갔다가 귀국하던 이경재 가족이 뉴욕 항만청에 구금되어 출국 위기를 맞아 당황스럽던 그들이 김헌식에게 연락되어 그가 보증한다는 서명 하나로 출국을 면케 된  것이다. 1914년 9월에 김헌식은 독일영사관을 찾아가 뉴욕한국인애국회의 명의로 독일의 전쟁목적으로 사용해달라며 $20을 기부했다.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기에 김헌식의 일본 증오의 표식이 그런식으로 표현된 것이었다 (신한민보 9/10/1914). 1916년 미국에서 반아시아이민법안이 논의되고 있음을 안 그는 미 국무부에 서신을 보내며 이 법안에서 피압박 약소국 백성인 한국인은  제외해달라 호소하기도 했다. (미 국무부 문서번호 150,951, 5/26/1916).
 이런 유의 그의 배일애국적 노력들은 끊이지 안했고 특히 1919년 3.1운동 당시 미국에서의 그의 활동은 괄목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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