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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추미애, 뤼순감옥서 안중근 만나다
<포토> 순국 103주기 안중근 평화사상 찾기 나선 추미애 의원 동행기
기사입력: 2013/03/28 [11:54]   honaminworl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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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평화신문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103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이 날을 기념해 추미애 의원과 함께 중국 대련지역 안중근 역사 탐방을 하기로 한 날입니다.

중국 대련에는 103년 전 안중근 의사가 순국했던 당시의 여순감옥이 역사박물관으로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사형선고를 받았던 당시 법정도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곳입니다.

300명 대한민국 국회의원 중에서 3월26일이 안중근 의사 순국일이라는 것을 평소 기억하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300명 국회의원 중에 안중근 평화사상에 대해 오래 전 부터 주목하고 있는 분이 여성판사 출신 국회의원 추미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미애 의원은 일본 방문 중에도 일본 정치인들에게 안중근 평화사상을 당당하게 주창해 온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안중근 평화 정신 속에서 국민화합과 남북분단을 극복하는 통일의 열쇠를 찾아야 한다고 늘 주장하시는 분입니다.
 
정치인 누구에게나 바쁜 3월 26일,추미애 의원과 단 둘이서 100년 전 청년 안중근을 찾아 나섰습니다.
아침 9시 50분 인천공항에서 대련행 비행기를 타고 대련 현지시간 10시 10분에 대련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점심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공항에서 곧바로 여순감옥이 있는 곳으로 1시간 자동차로 달렸습니다. 하루 일정이 너무 빡빡하기에 강행군하기로 했습니다.

여순 감옥에서 안중근 의사기념관과 수감했던 방, 사형이 집행된 곳을 찾아 참배하고 곧 바로 당시 재판을 받았던 법원으로 이동했습니다.
당시 관동도독부 여순지방법원이었던 법원 건물은 지금도 원형이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곳입니다.
당시 법정 안을 들어서면 피고 안중근이 앉았던 의자, 검찰석, 재판관이 앉았던 자리가 그 위치에 그대로 보존된 곳입니다.

추미애 의원은 이곳 법정을 둘러보고 방명록에 " 평화의 순교자 안중근 의사의 뜻을 꽃피워 한반도와 세계의 미래를 열겠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추미애의원은 이날 오후 3시 대련 한국국제학교에서 마련된 안중근의사 순국 103주기 기념 강연회에서 특별강의를 했습니다.
대련한인회(회장 박신헌)가 마련한 안중근 강연회에는 대련 한국국제학교 고등학교 3학년생과 학부모, 대련한인회 임원, 평통자문위원 등 한인사회 지도자 등 25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추 의원은 청년 안중근이 살았던 시대상황을 설명하고,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척결했던 이유가 동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평화사상을 순교적 평화로 정의하고 그 후 100년 김대중 대통령이 실천적 평화주의자로 노벨평화상을 받게 된 역사를 설명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사형직전까지 집필하다 마감을 하지 못한 미완의 동양평화론 서문에 한중일 3국이 서로를 인정하고 협력해서 공동번영의 길로 나가자고 했던 그 정신을 바탕으로 오늘 날 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남북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당시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 속에 한중일 3국의 공동번영을 위해 공동은행 설립, 공동화폐사용, 공동의회 구성  등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날 유럽연합이나 유엔 같은 공동체를 100년 전 30대 사형수가 사형 직전까지 집필했던 것입니다.
 
사형직전 유언을 통해 조국이 완전히 독립될 때까지 시신을 고국으로 옮기지 말라고 했던 안중근의 시각으로 볼때 현재의 남북분단은 슬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자들이 안중근 제대로 유언을 받들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안중근은 고곧한 영웅일 수 밖에 없습니다.
 
다음은 2013년 3월 26일 정치인 추미애와 고독한 영웅, 안중근의 만남 현장을 담은 사진입니다. <글 사진 / 정광일 = 안중근평화재단청년아카데미 대표>  


 
▲  2013년 3월 26일 아침 서울을 출발해 대련공항을 거쳐 오전 11시 30분  추미애 의원이 여순감옥 앞 마당에 도착했습니다.  사진 왼쪽 부터  현지에서 안중근 유해찾기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김월배 박사,  추미애의원,  대련에서 20년 넘게 살고 있는 김성수 안중근평화재단청년아카데미 이사 그리고 필자 입니다.    © 안중근평화신문
▲  추미애 의원이 감옥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이 감옥은 러시아가 만들었다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인수해 증축하는 과장을 거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 안중근평화신문
 
▲  감옥내 실내에 마련된 안중근 의사 관련자료들이 정리되어 있는 기념관입니다. 들어서저 마자 동상이 한 눈에 들어 옵니다.    © 안중근평화신문
 

▲  사형직전 안중근 의사를 찾아온 두 동생이 면회하는 사진도 있고,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한 재판과정을 취재했던 당시 영국 신문도 벽에 부착되어 있습니다. 추미애 의원이 주의깊게 자료를 살피고 있습니다.    © 안중근평화신문
▲  중요한 자료는 직접 핸드폰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찍을 것이 너무 많습니다.    © 안중근평화신문
 
 
▲  없다고 아첨하지 말고 있다고 교만하지 말라는 안중근 의사 유묵을 보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1910년 2월 14일에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사형선고 이후 당시 감옥 소장은 안중근 의사에게 글을 쓸 수 있는 필묵을  줍니다.  안중근의사가 남긴 유묵은 모두가 대한국인 여순옥 중 2월, 3월이라는 날짜가 있습니다.  2월 14일 이후 부터 순국날인 3월 26일까지 40여일 동안 글을 쓴 것입니다.   ©안중근평화신문
▲  안중근 의사가 사형집행날 아침에 썼다고 알려진 마지막 유묵을 추미애 의원이 응시합니다. 위국헌신군인본분입니다.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법정에서 스스로를 대한의군참모중장이라고 했던 안중근 의사 호칭을 의사 보다는 안중근 장군으로 해야 하는 이유가 이 마지막 유묵 속에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중근평화신문
▲  안중근 기념관 자료를 다 돌아 본 이후에  추미애 의원이 다시 안중근 장군 동상 앞에 섰습니다.  추 의원이 안중근  장군 얼굴을 쳐다 봅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요?    ©안중근평화신문
▲  안중근 장군 자료실을 나와 당시 수감했던 방 앞에 도착했습니다.  현재 감옥을 역사 박물관으로 관리하는 관리소측에서 친절하게 영어 등 여러나라 글로 "이곳은 조선야국지사 안중근이 수감되어있었던 방"이라는 안내문을 부착해 놓았습니다.     © 안중근평화신문
 
▲  추미애의원이 방안을 들어다 보기에 앞서 약간 수심에 잠긴 표정입니다.  순간 안중근 의사가 방 안에 있고 추 의원이 면회 온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추미애 의원 표정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감방 안에 두고  면회온 연인의 순간적 표정과 같았습니다.    © 안중근평화신문
▲ 안쓰러운 심정으로 창 문을 통해 감방 안을 보고 있습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벼루와 붓통이 조그마한 책상 위애 놓여 있었습니다.   이 곳 차가운 감방에서  103년 전 청년 안중근이  "국가안위를 걱정하며 애를 태운다"는 "국가안위노심초사" 글을 쓴 곳입니다.  © 안중근평화신문
▲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 장군이  순국한 현장입니다. 그 자리에 안중근 장군이 한복을 입은  마지막 모습이 담긴 사진이 놓여있습니다.  안중근 장군이 마지막에 입은 한복은 누가 만들었느냐는 두 가지 설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안중근 장군의 어머님이 만들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당시 여순감옥소장 부인이 감옥소장의 지시를 받고 밤새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추미애의원은 한 참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103년 전 교수대에 선 안중근 장군의 모습이 보였을까요?  이 곳에서 안중근 장군은 최후 유언을 통해 동양평화 만세를 세번 외쳤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 안중근평화신문
▲ 이곳은 사형을 선고한 당시 법원 앞 마당입니다.  사진 오른쪽은 이곳 법원 건물관리를 책임맡고 있는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 박귀언 대표 입니다.  이 건물이 원형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던 사연은 책 한권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서울 세계일보가 창간될 1990년대 초 세계일보가 국민적 캠페인으로 안중근 재발견 이슈를 제기해 국민들로 부터 엄청난 호응을 받았고 그 때 모아진 국민성금을 종자돈으로 해서 철거위기에 처해있던 법원 건물를 중국 정부를 설득해 매입해 원형대로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박귀언 대표는 당시 세계일보 사회부 기자로 안중근 시리즈를 연재하신 분입니다. © 안중근평화신문
 
▲  1910년 2월 14일 사형이 선고된 당시 법정입니다. 당시 외신기자들도 취재를 했던 세계의 시선이 집중된 역사적인 법정입니다. 안중근법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안중근평화신문
▲  안중근 법정을 원형대로 보존해온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맡고 있는 박귀언 대표와 추미애 의원이 법정에서 인증샷을 찍었습니다.  두 분 모두 안중근 매니아 입니다.  © 안중근평화신문
▲  법원 방문을 마치고 방명록 글을 남겼습니다.  "평화의 순교자 안중근 의사의 뜻을 꽃피워 한반도와 세계의 미래를 열겠습니다"    © 안중근평화신문
▲  3월 26일 오후 3시, 대련 한국국제학교 대강당입니다. 학생과 학부모 대련 한인사회 지도자들이 안중근 추미애 의원의 강연을 듣기위해 모였습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 시간입니다.    © 안중근평화신문
▲ 안중근 강연회는 대련한인회가 마련한 행사입니다.  대련한인회는 올 해부터 안중근 행사를 한인회 주요 사업으로 확정했습니다. 안중근 역사유적자가 있는 대련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강연을 듣고 학생들은 5월 달에 안중근 장군을 주제로 글짓기 대회를 별도로 하게 됩니다.    © 안중근평화신문
▲  모두가 진지합니다.  추미애 의원 목소리에도 힘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100년 전 안중근 의사의 순교적 평화가 100년 후 김대중 대통령의 실천적 평화로  이어졌다고 설명합니다.  © 안중근평화신문
▲ 안중근 평화정신 속에서 남북화해협력시대를 열 수 있는 열쇠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안중근 의사가 살아있다면 김대중 대통령 처럼 햇볕정책을 펼쳤을지도 모릅니다.  파워포인트를 사용한 추미애의원 강연 자료 끝부분에 등장한 이 사진입니다. 김대중의 햇볕정책과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의 관계를 설명해 주고 있는 사진입니다. © 안중근평화신문
▲  60분 강연을 마치고 대련한인사회 지도자들과 기념사진입니다. 여기에는 대련영사출장소 소장, 한인회 임원, 평통자자문위원도 있습니다.    © 안중근평화신문
▲  안중근 장군과 정치인 추미애의 만남은 이렇게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추미애 의원 마음 속에는 100년 전 대한국인안중근의 평화정신이 꽉 자리잡고 있을 것입니다.   ©안중근평화신문

원본 기사 보기:안중근청년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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