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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한인사회
상항한국인교회 중심 국민회운동 주도한 이대위
기사입력: 2009/05/13 [05:46]   honaminworl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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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상항한국인교회를 중심으로 민족목회와 국민회운동을 주도한 이대위

    1903년 하와이 노동이민이 아닌 선교와 유학으로 도미하여 건전한 기독교 신앙과 민족정신으로 목회를 하며 반일구국운동을 전개한 삼총사와도 같은 세 젊은이가 윤병구, 신흥우와 이대위다. 이들은 1903년 다 각기  하와이와 대륙에 도착하던 초기부터 교회와 한인의 애국단체를 형성하며 ‘민족목회’라 부를만큼 민족과 조국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특히 이대위는 흔히 재미사회에서 4명의 지도자로 내세우는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 박용만 등에 못지 않게 샌프란시스코의 한국인연합감리교회와 대한인국민회 등을 통해 눈부신 활약을 하였기에 저자는 ‘미국속의 한국인’에서 이대위 목사와 그의 국민회에서의 활약을 극구 칭송한 최봉윤 교수와 함께 이대위를 제5의 재미사회의 지도자로 추대하며 기리고 싶다.
 

    1878년12월28일 평양 근처 강서에서 출생한 이대위는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 평양의 기독교 학교인 숭실전문을 마치고 25세가 되던1904년 샌프란시스코에 유학생으로 도착하여 교회와 한인단체들을 조직하고 동포의  권익과 한국의 독립을 위해 안창호 등과 함께 애국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재미사회나 국내외의 한인들에게 이대위 목사나 그의 대한인국민회의를 통한 지대한 애국적 활동들이 잘 알려저 있지 않다. 특히  샌프란시스코의 한국인연합감리교회의 담임목사로서 교인과 동포의 권익을 위한 민족목회나 국민회를 통한 반일구국적인 독립운동들은  재미사회의 지도자로 손색이 없기에 이를 좀더 밝히며 동포 동족과 후손들에게 알리고 싶다. 그의 목사안수나 학위는 상항교회 부임 이후여서 미연합감리교에서의 목사안수는 1912년에, 버클리대학 U.C. Berkley에서의 사회학 학사 학위는 1913년 5월이었다. 그가 32세 되던 1911년 2월부터 50세가 되던 1928년 6월 세상을 떠나기까지의 17년의 상항 한국인감리교회에서의 목회와, ‘대도’를 복간하여 발행하며 통합된 한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에서의 민족운동은  그를 재미동포의 목자와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기에 좀더 그를 소개하여 기록의 역사로 남기어 동포와 후손들에게 알리려 한다.

    기독교 목사나 신학자가 아닌 최봉윤 교수가 ‘미국속의 한국인’에서 소개한 이대위에 대한 증언을 먼저 들어보자: ”이대위 목사는 매우 헌신적인 목사였고 진실한 애국자였다. 그는 1910년부터 1928년까지 [상항의]한인감리교회의 일을 감당하면서 ‘신한민보’의 편집인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한인국민회의 지도자였다. 물론 그러한 그의 활동은 한인사회와 동포들을 위해 보수도 받지 않고 행한 것이었다. 사회 단체들 일 때문에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았고 쉴 틈이라고는 전혀 없이 일을 했다. 그 결과 그의 건강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마침내 1928년에 폐암으로 사망했던 것이다. 이 목사와 절친했던 96세의 양주은 옹은 이렇게 말했다. ‘이목사는 예수님이 걸으신 길을 따르신 진정한 제자였지요…’”*

 

   이대위는 샌프랜시스코에 도착한 몇달 뒤인 1903년 9월에 동포들의 친선을 도모하는 ‘친목회’를 결성하고 1905년 4월에는 이를 기초로 최초의 한인 정치단체인 ‘공립협회’를  안창호 등과 조직했다. 또한 상항감리교회의 설립에 처음부터 참여하여 예수의 복음에 기초한 선교운동과 민족운동을 병행했다. 그러면서 안창호도 그러했듯이 포틀랜드 중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미국의 기초교육을 다시 받으며 30세되던 1908년에 졸업하고 동년 6월에 상항으로 돌아와 가을부터 버클리대학에 입학하면서 그의 동포와 교회, 민족운동은 더 적극적으로 펄쳐젔다. 공립신보, 대도, 신한민보 등에 많은 애국애족적인 글들을 발표하는 한편 1909년 2월 재미 여러 한인다체를 하나로 통합하는 ‘대한인국민회’ 설립을 위해 공립협회 대표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08부터 1923년 사이에 이대위 목사가 공립신보, 대도, 신한민보 등에 집필자와 편집 발행인으로 백 수편도 넘는 글들을 통해 그의 관심과 의도, 교회와  민족을 사랑하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 그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건전한 기독교 신앙, 재미사회와 교회, 반일구국적인 각성과  격려, 미국정신의 연구와 한인들의 정착, 멕시코의 동포들을 위한 배려에 이르기까지 그의 글들은 다양하고 폭 넓으며 이론이 정연하고 애절하다. 그는 글들로 동포와 기독자들을 일깨우며 민도를 높이고 반일독립의 효율적인 운동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동시에 국민회의 부회장 회장등을 십수년을 연임하며 거동포적인 애국애족운동에 혼신을 다했다.   그의 1910년대의 상항교회의 담임자나 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 시절과 그 이후의 활동에 대해선 뒤에 다시 상고하려 하기에, 여기선 그의 초창기 활동 중  재미사회와 교회, 동포들의 규범이 되는 몇가지만을 소개하려 한다.

   첫쩨 이대위의 인격과 목회:사람됨이 정직하고 표리와 사리가 분명하며, 건전한 신앙과 민족에 대한 열정을 겸비한 이대위는, “부지런하고 능력있는 일꾼”이며, 그는 “끊임없는 노력과 담대한 정신으로” 활동하는 “타고난 지도자”처럼 보였다고 그와 오랜 세월동안 함께 활동하던 동역자와 친지 교인들은 말한다. 이런 인격과 정신을 가진 그가 상항교회를 담임하여 재미사회에서 우리 민족 전체를 살리려는 “민족목회”즉 복음서의 예수 정신을 따르는 “신앙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하였기에, 이런 이 목사의 애국애족적인 선교활동은 상항교회에서만 펼쳐진 것이 아니라 전 재미한인교회나 동포사회에까지  파급되어 갔다.

 
   둘째 재한인국민회를 중심한 민족운동: 상항교회 목사이면서 당시 한국의 ‘가정부’라 할 ‘대한인국민회’의 북미지방 총회장으로 선출된 이대위는 당시 동포들 사이에서 “국민회총회장’하면 언제나 이대위 목사를 지칭하는 것이었으며, 그는 ‘총회장’에 따르는 책임과 역할을 헌신적으로 수행하여, 일제의 갗가지의 감시와 억압에도 불구하고 국민회의 위상을 높이어 미국 정부도 국민회를 나라 없는 한국의 ‘대사관’에 버금가는 예우와 대표적인 권위를 인정할 정도였다. 따라서 이대위가 총회장으로 활약하던 1910년대의 국민회는 아직 임시정부도 조직되지 못한 한인사회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대신하는 ‘가정부’의 역할을 충실히 감수했다.  국민회의 위상을 이토록 높이는데 이대위는 크게 공헌했으며 그는 국민회가 미국과 세계의 여론을 주도하며 한민족을 대표하여 그 의견을 제시하는 데까지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셋째 언론 문서를 통한 활동: 일찍이 안창호 등과 조직한 ‘공립협회’에서 최초의 한글신문인 ‘공립신보’를 발간하여 모든 재미동포들에게 배포하며 조국 광복의 운동을 전개할 때 이대위는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상항교회에서 1908년 12월에 신앙괴 민족정신을 선양할 목적으로 창간된 월간지 ‘대도’가 3년여 만에 폐간된 것을 이대위는 담임목사로 취임하며 즉시 ‘대도’를 복간하고 그 주필로 활동하면서 그의 건전한 신앙과 신학사상, 미주 기독자와 동포들을 경성케 하는 글들을 발표하며 격려했다. 또한 정간상태에 있는 국민회의 기관지인 ‘신한민보’를 인적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대위가 국민회의 총회장직을 맡으면서 1913년 6월 자신이 직접 주필직을 담당하며 복간했다. 신한민보엔 “한인의 근대적인 민족, 민권, 민주의식”을 고취하며, 그의 민족애와 구국적인 열정, 예언자적인 소리와 함께 거동포적이 반일구국운동을 독려하는 글들이 가득했다.

   넷째 이대위의 활약으로 인한 미국에서의 국민회의 위상: 1910년 한일합방 후 국권과 외교권까지 상실한 재미한인들의 입장은 난처한 일이 많았다. 1913년 6월 가주 헤미트 (Hemet)  살구농장에 일하려 갔던  11명의 한인이  그곳의 600여명의 노동자들에게 쫓겨온 사건의 사후 처리과정은 미정부 개입과 함께 대한인국민회와 일본 대사관  사이의 민족적 대립의 대사건이 되었다. 노동을 주선한 최순성과 미농장주는 한인 노동자들의 왕복여비 지불로 사건을 매듭짓기로 타협했다. 그러나 발단은 상항 일본 영사가 대신하여 한인들의 손해배상을 받아주겠다고 나섰다가 단호하게 거절을 당하고, 미 지방신문은 “재미한인들이 나라와 원수를 생각하여 자신들의 손해에도 불구하고 원수의 보호해 주겠다는 욕스러운 간섭을 거절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후 다시 워싱턴의 일본 공사는 헤미트 사건은 미국이 미일통상조약을 위반한 것이라고 미 정부에 항의했다. 그   배후에는 한인은 일본의 보호하에 있는 일본 국민인데 미국인이 이런 한인을 강제로 쫓아냈으니 일본 영사가 미국 정부와 이 사건을 처리해야 한다는 음모가 숨겨 있었다. 이에 북미국민회 총회장 이대위는 일본의 많은 음모를 꿰뚤기에 이를 깨트리기 위해 국민회 이름으로 미 국무장관 브라운에게 전보를 보내며, “일본 공사가 헤미트 사건을 가지고 미 정부에 항의하였으나 재미한인들은 일본이 한국을 합병하기 이전에 온 자들이기에 일본인도 아니요 일본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본 공사의 간섭도 부인하고 미국 정부의 조사도 원치 않습니다”  이 전문을 받은 브라운 국무장관은 1913년 7월1일 연합통신의 전문을 통해 이 사건의 조사를 즉각 중지하며,  “한인은 명백히 일본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인의 사건이 생길 때에는 한인 단체와 교섭하여 해결을 지어야 한다”했다. (유동식,하와이의 한인과 교회.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1988. pp.70-71)   확실히 이는 이대위의 활약이 만든 역사적인 작품이요, 재미한인들로선 일본의 지배를 배제하며 국민회의 위상을 높이는 중대 사건이었다.

   다섯째 민족의 권익위한 열정과 끈질긴 노력: 이대위의 동족을 사랑하며 동포의 권익을 위한 부절한 노력은 난관에 부닥치는  동족들을 대할 때마다 그치지 안했다. 그 한 실레를 무여권으로 입국하는 망명객이나  유학생들을 구출하던 그의 지략과 노력에서 여실히 본다. 사실 한일합방으로 국권과 외교권까지를 상실한 수백의 한인 정치적 맘명 학생들은 일제 관헌의 박해를 피해 중국 대륙으로 피신하거나 다시 밀항으로 미국에 탈출하여 오나 여권이나 아무런 증명서가 있을리  없었다. 이런 망명 유학생들 중에 한때 13명이 여권 없이 중국으로부터 상항에 입항했다가 억류된 한인들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대위는 국민회가 보장하겠다며   즉각적인 입국허가를 이민국에 청원했으나 거절돼  추방될 위기에 있었다. 그러나 이를 포기하지 않은 이대위는 바로 변호사를 구해 국무장관 브라이안 (Bryan) 에게 청원서를 보냈다. 요지는 이들 13명의 한국인 정치적 망명 학생들의 갈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중국인이 아니기에 중국으로 갈 수 없고 한국으로 보낸다면 한국을 지배하는 일제가 박해할 것이기에 한국으로 보낼 수 없다. 그들이 여권 없는 이유로 ‘자유의 나라’ 미국이 받아주지 않는다면 태평양에 뛰어드는 길 밖에 없다. 이에 국무장관은 특별입국을 허락했다. 이후 이대위는   헤미트 사건을 통한 국무장관의 재미한인들에 대한 유권적 해석과 13명의 무여권 망명 유학생들의 입국사건을 계기로 이후 8년여 동안 많은 무여권 한인 정치적 망명 유학생들의 임국을 가능케  했다.

   특히 무여권으로 입국이 거절되고 수용소에 억류된 한인들을 구출해야 할 때마다 국무장관의 유권적 해석과 한국의 정치적 망명 유학생의 구실은 큰 무기가 됐고, 이대위는 국민회가 그 신분을 보장한다는 단서와 함께 밀려우는 그들을 구출하는 데 조금도 지침이 없이 최선을 다했다. 그 후 무여권으로 억류된 망명 유학생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70여차나 격리 수용소 (The Quarantine Station)를 방문하며 그들을 수용소에서 석방시켜 미국의 입국을 가능케 했다. ( Report of The Board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1914, p.66) 이대위 목사의 이런 무여권 한인 망명객이나 유학생들을 위한 변호와 입국허가 청원의 근거는 “한국 학생이 일본 정부의 여행권을 휴대할 이치가 없으니 그들에게 일본 여행권을 묻지 말고 상륙을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고, 이민국은 이를 받아들여 한국 망명 학생들의 입국을 허락한 것이다.  물론 국민회는 그들의 신분과 생활에 관한 모든 문제를 담보하는 조건부가 붙어  있었으나 얼마나 감격스런 쾌거였는가. 확실히 이는 다 궁지에 처한 동족을 사랑하는 이대위의 열정에서 나온 활약이었고 동시에 국민회의 권위와 위상은 점차 더 높아만 갔다.
 
<박성모 / 새누리 편집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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